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NI Dec 04. 2017

여행지의 맛

암스테르담에서의 하루  



지난여름 네덜란드의 즈볼러(Zwolle)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지도를 보면 도시 전체가 별 모양처럼 생긴 즈볼러는 오랜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갈 이유가 있는 곳이다. 여름 더위에 지칠 대로 지친 터라 공항을 나서자마자 피부에 닿는 선선한 공기만으로 한 계절을 탈출했다는 해방감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차로 달리는 내내 창문을 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맛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지난 첫 여행의 서투름을 만회하고자 두툼한 책 한 권도 읽었다. 바이킹, 렘브란트, 고흐, 운하, 한자동맹 등 네덜란드의 어제와 오늘을 관통하는 오백 페이지 가량의 글을 읽었는데 막상 여행을 오니 책 내용에 있던 청어만 생각났다. 네덜란드에서는 절인 청어를 ‘하링(haring)’이라 불렀다. 사실 네덜란드의 음식은 와플 과자, 감자를 으깨거나 튀긴 것, 미트볼처럼 특별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생으로 먹는 문화 자체가 생소한 유럽에서 청어가 우리나라의 청국장 같은 음식인 게 색달랐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얘가 정말 그걸 먹으려고 하는 건가’하는 표정으로 하링은 양파와 함께 생으로 먹는다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결연한 눈빛으로 의지를 보였다.


하루는 혼자 암스테르담에 갔다. 예전에 반 고흐 미술관을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에 미리 한국에서 홈페이지로 예약을 해뒀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내려 다시 트램을 타고 미술관으로 가는 내내 관람을 마치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청어요리를 먹는 상상을 했다. 친구는 일 때문에 바쁘기도 했고, 하링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기회였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 벤치에 앉아 친구가 챙겨준 바나나 하나를 먹었다. 사방에는 햇살이 가득했고, 마른 공기가 몸과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술관은 겉으로 본 것보다 규모가 방대했다. 장신들 사이에서 작품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보다 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언제 또 방문할지 몰라서 기획 전시에 아트샵도 들렀다. 너른 잔디밭에 삼삼오오 여름날을 즐기는 무리들이 눈에 띄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은 듯 옆에 있는 국립 현대 미술관의 아트 숍까지 구경했다. 모든 건물에서 나오니 오후 4시를 한참 지나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을 바나나로 때운 셈이다. 햇빛은 오전의 빛깔보다 더 투명했고, 눈앞에 펼쳐진 잔디밭은 더할 나위 없는 매트리스 같았다. 어기적거리며 습기를 머금은 잔디밭에 대자로 뻗었다. 행복한 피로였다고 포장하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거리로 나섰다. 미리 알아본 정보가 없어서 하링을 팔 것 같은 식당에 무작정 들어갔지만 감자 요리나 고기를 파는 곳만 걸렸다. 몇몇 레스토랑을 전전하다가 갑자기 한국에서 알아뒀던 브런치 레스토랑이 떠올랐다. 하링의 원대한 꿈은 잠시 잊고 뭐든 먹기로 타협했다. 인터넷으로 봤던 레스토랑의 좋은 이미지 때문이기도 했다.


알록달록한 테이블이 놓인 노천에 잘 차려입은 여자 둘이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브런치 메뉴가 있었지만 브런치는 이미 끝났고 디저트만 주문이 가능했다. 점원의 친절한 미소와 상관없이 입 주변이 파르르 떨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분노의 마음도 배고픔 앞에서는 불이 붙지 않는 라이터일 뿐이었다. 표정을 정돈하고 애플파이와 레몬 진저 티를 시켰다. 내 속도 모르고 점원은 “파이에 생크림을 곁들이면 더 맛있는데 같이 줄까?”, “진저 티에 꿀 넣으면 맛있어”와 같은 말을 했다. 다 달라고 했다. 뭐든 더 추가하는 게 배를 채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점원은 디저트를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따뜻한 미소로 “enjoy”라는 말을 남겼다. 날카로웠던 마음이 조금 무뎌지는 것 같았다. 시나몬 가루를 뿌린 애플파이를 달지 않은 생크림에 찍어 한입 가득 먹었다. 훌륭한 맛이었다.


레스토랑을 나와서 거리의 자전거 무리를 지나 상점에 갔고, 눈에 보이는 트램을 타고서 목적지 없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해가 낮게 깔리고 조금씩 농도를 달리하고 있었다. 슬프게도 디저트의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득 외로움까지 느꼈다. 친구와 같이 왔더라면 실용적인 친구의 제지에 미술관에 적당히 있었을 것이고,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포크를 부딪치고 수다를 섞어가며 풍성한 음식을 즐겼을 거란 상상을 했다. 오후 6시도 되지 않았는데 거리는 한산했다. 거리보다 트램 정류장에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평소의 하루를 덤덤히 보내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였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생경했다.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집으로 돌아갈 목적을 가진 듯 서 있었다. 오늘을 이야기할 사람이 그리웠다. 그냥 즈볼러로 돌아가서 친구랑 술이나 진탕 마시고 싶었다. 중앙역으로 가서 제일 빠른 티켓을 끊고, 자판기에서 크로켓을 뽑았다. 마지막으로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계산대로 걸어가다가 냉장 식품 쪽에서 밀봉된 비닐에 싸인 하링을 발견했다. 육성으로 “오 하링!”을 외쳤다. 타국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이렇게 반갑진 않았을 것이다.


즈볼러행 기차는 15분 후에 도착 예정이었다. 갈증이 나서 선 자리에서 맥주 한 캔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감자 맛이 나지 않는 크로켓이 안주였다. 봉투에 든 하링은 멸치보다는 크고, 꽁치보다 작았다. 뭔가에 절여 있어서 비늘이 듬성듬성 벗겨져 있었고, 통조림에 든 꽁치처럼 흐늘거렸다. 길거리나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하링을 먹었으면 좋았겠지만 편의점표면 어떠랴. 순간 손에 들린 비닐봉지 안에 하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뭔가를 이룬 기분이었다. 그날은 밤늦게까지 와인을 마셨다. 나는 친구에게 배고픔이 여행에 미치는 영향을 장황하게 늘어놓았고, 술이 더 들어갔을 땐 외로웠노라고 고백했다.


다음날 친구는 아보카도와 토마토, 올리브, 양파를 곁들여 하링 브런치를 만들어 주었다. 잔뜩 기대를 하고 하링을 한 입 넣는 순간 말캉한 생선 껍질이 훅 들어오다가 남은 잔뼈가 뒤통수를 쳤다. 느끼하고 비릿했다. 야채가 아니었더라면 멀쩡한 음식을 버리는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얀 쌀밥에 짭조름한 갈치 젓갈을 올린 한 숟갈이 간절했다. 하링 작전은 실패였다. 맛있게 먹지 못한 ‘한’은 남았지만 그날의 처절했던 배고픔이 지금은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원하지 않았어도 빈속에 먹은 애플파이의 달콤함과 점원의 따뜻한 말 한마디도 좋았던 순간이었다. 기막힌 건 그날의 베스트 음식이 허탈감과 절망의 눈빛으로 기차를 기다리며 들이킨 맥주 한 캔과 인스턴트 크로켓이라는 점이다. 왜 힘들었던 순간은 시간이 지나 더 멋진 옷을 입고 반짝이는 모습으로 다가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음에 네덜란드에 간다면 다시 하링에 도전하려 한다. 부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의 맥주 한 캔과 크로켓이 베스트 음식이 되질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가의 이전글 책살이 라이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