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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Dec 11. 2017

12월의 나와 당신에게

일기를 가장한 편지


12월이다. 한 해의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더 넘길 페이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야 마는 달. 꽤 열심히 적은 올해의 일기도 세 장밖에 남지 않았다. 꾹꾹 눌러쓴 글에는 먹고, 일하고, 소비했던 기록, 계절에 대한 소회, 누군가와 나누었던 대화, 크고 작은 기쁨과 실망이 섞어찌개처럼 담겨있다. 질량으로 따지면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고, 가끔은 내가 샌드백이 된 듯 얼마만큼의 힘듦을 감당해야 하는지 모를 나날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한 술 뜬 섞어찌개에서 우연히 비계가 붙은 고깃살을 건지기도 했다. 견딜 수 없는 감정으로 점철된 일기가 온점으로 끝나도 내일을 채울 빈칸은 분명히 있었다.


요즘엔 한낮의 다사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하루가 금방 저문다. 가끔 밤이 너무 길다고 느낄 때 인생의 절기에서 빠르게 곁을 떠난 사람들을 떠올린다. 같은 하늘 아래 살아도 함께 하길 포기한 사람들과 그조차 꿈이 아니고서는 소망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한때 삶에 단단하게 채워져 있던 조각이 떨어져 나갔는데 무너지지도 않고 그 틈으로 바람이 불고, 빛이 들고, 먼지도 쌓인다. 사람을 떠올리는 일은 권태로움을 견디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무너지지도 않고 소외된 말과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을 찾아 헤맸다. 나누지 못한 말은 유서가 되어 머릿속을 떠돌았다.


정말 사랑했던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매일 버스를 타고 병원이 있는 종점을 향한 적이 있다. 종점에서 다시 노선이 시작되는 버스에 오르면서 이곳이 만남의 종점이 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시간이 흐른 후 생각해보니 걱정과 불안에 휩싸이면서도 어떤 모습이든 볼 수 있어서 좋은 때였다. 어떤 고통은 되돌릴 수 없는 행복의 순간이었다.


얼마 전에 손을 씻다가 아린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뭔가에 벤 자국이 있었다. 물에 닿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정도로 상처가 너무 작아서 신경을 안 쓰다가 다시 손을 씻을 때 아픔을 느끼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종이에 벤 것 같았다. 혹시나 해서 다른 손을 봤는데 비슷하게 난 상처에 딱지까지 앉은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베이는 순간에 알아채고 신경을 썼을 텐데 몰랐다는 게 의아했다. 걱정도 손에 난 상처처럼 언제 왔다 간 줄도 모르게 지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알아챈다 해도 금방 나을 거란 생각으로 무디게 대하는 거다.


사실 일기장에 적은 온갖 머리 아픈 일도 따져 보면 심각하다고 단언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버스나 기차에서 창 밖의 멋진 풍경을 바라본다 한들 모든 순간을 기억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감정의 성질도 좋고 나쁘고를 떠나 다 그러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책도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모두 감동을 전하지 않는다. 문장이 함의하고 있는 주변부에 대한 끈질긴 이해와 몰입이 없다면 한 권의 책을 잘 읽었다고 볼 수 없다. 결국 ‘너머’의 단조로움을 견뎌야 한다. 상처에 무뎌지고, 그리운 사람을 잊지 않고, 권태로움을 견디는 잔잔한 일상 안에서 피어오르는 기쁨이 있다고 믿는다.  


최근에 다시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에서는 호흡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힘든 동작을 할 때 긴장이 돼서 숨을 참을 때가 있는데 그때도 들이마시고 내쉬는 걸 강조한다. 크게 숨을 쉬니까 어려운 동작도 수월하게 느껴진다. 요가 전에 하는 명상 시간을 좋아한다. 숨을 쉬는 일에 집중을 하다 보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것과는 다른 평화로움을 느낀다. 눈이 소복이 쌓인 산사에 있다든지 나무가 울창한 숲 속을 걷는 기분이다.


우리는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지만 평소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의 힘」에서 작가는 우리의 삶 속에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숨을 쉬는 행위로 표현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은 한 생명의 삶과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숨을 내쉴 때는 가볍게 한 번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이다. 숨을 참아보면 금방 숨 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삶과 죽음은 둘째 치더라도 요가 선생님이 첫날 단번에 나를 알아보시고는 꾸준히 다니라고 하셨다. 그렇다.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잘 하고 싶은 게 해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소망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 소망을 실천하고 있다. 의식하지 않고 쉬는 숨이 소중하듯 크게 별 탈 없던 올해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다. 분명한 건 극적인 사건이 없는 한 장 한 장이 모여서 꽤 괜찮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이다. 그저 새해라는 또 다른 챕터를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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