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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Dec 25. 2017

어바웃 타임

지금 이 순간의 시간


‘시간’은 꽤 오랫동안 이야기의 단골 주제였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푸념을 한 번쯤은 한다.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과거의 어떤 지점으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하고 유학을 가겠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밤새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최상의 컨디션과 외모를 유지했던 때를 그리워한다. 수정 테이프로 과거의 시간을 지운 자리에 새로운 현재를 덧칠할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왜 없겠는가. 나는 과거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급격하게 말수가 줄어든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 현재를 평가하고, 부정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솔직히 과거의 나로 돌아가서 한 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을 자신이 없다. 여전히 서툴고, 쓸데없이 생각이 많고, 더 치열하게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처럼 무심하게 흘러갈 뿐인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마냥 얽매인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팀’은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남자들에게 시간을 여행할 수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된다. 주먹을 쥐고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순간을 떠올리면 그 시간으로 갈 수 있다. 팀은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과 달리 표현이 엇박자이고, 어딘가 능수능란하지 않은 사람이다. 집에서 괴짜 동생인 킷캣에게 좋은 오빠이자 아버지의 탁구 상대가 되어주는 착한 아들이지만 송년 파티에서 신나게 춤을 추지 못하고, 키스 타임에 옆 상대에게 시도조차 못한 채 뒤에 가서 후회하는 캐릭터다. 그런 그가 오랜 시간 갈구해 왔던 건 사랑이다. 첫사랑 샬롯을 놓친 후 메리를 만나면서 시간 여행을 통해 사랑을 하고 아름다운 가정도 이룬다. 시간 여행이 필요한 때는 보다 용기가 필요하거나 서투른 자신이 싫은 순간이다. 하지만 모든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과거를 수정할 때마다 또 다른 변수가 존재한다. 여동생 킷캣은 늘 나쁜 남자에게 끌리고, 차보다 술을 좋아한다. 모든 게  평온했던 어느 날 남자 친구와 싸우고 팀의 집으로 향하던 중 사고가 나고, 팀은 동생의 과거를 손보려다 딸이 생면부지의 아들로 바뀐 걸 알고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킷캣은 내면의 상처를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다. 불행한 표정으로 자신을 실패자라고 하다가도 다시 왈가닥으로 돌아오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해진다. 이 모든 과정이 주인공 ‘팀’의 1인칭 시점으로 이어지고, 시간 여행자의 힘이 미치지 않는 범위의 이야기가 공존하고 있다는 게 좋았다. 그저 매일 조금씩 실패하고 좌절하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서 공감이 됐다.  


팀의 독백처럼 시간여행자에게도 “딱 한 번만 겪고 싶은 일”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다. 하필 겪고 싶지 않은 일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 팀은 아버지의 방으로 가서 암에 걸리지 않을 과거로 돌아가길 권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엄마가 자신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 반했고, 그 결과 너를 얻은 거라고 하며 거절한다. 과거를 고치면 살 수 있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잃기 때문이다. 둘은 마지막 탁구를 치고 아버지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여행을 떠난다. 햇빛이 부서지는 바닷가에서 젊은 아버지와 어린 팀이 뛰노는 모습이 담긴다. 팀이 시간 여행자의 신분을 떠나 가장 지키고 싶던 가치가 사랑이었듯 아버지 또한 자신의 사랑을 실천하고 떠난다. 내게도 딱 한 번 과거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보다 나은 현재를 위한 투자보다 그리운 사람을 만나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싶다. 아무래도 사랑보다 더 나은 가치는 없다.   


시행착오 끝에 팀은 더 이상 시간여행을 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행복의 공식으로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매일 매일을 다시 경험하라”고 했는데 그걸 실천하다 보니 오히려 과거로 갈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낀 이어폰 너머의 소리도 처음엔 소음이었지만 같은 상황으로 겪으니 흥겹고, 반복되는 일상의 순간도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결국 팀은 시간 여행자의 특권을 버리는 대신 “오늘을 즐기기 위해 미래에서 온 것처럼”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기로 한다.  


얼마 전에 달력을 샀다. 정확히는 일력이다. 달 단위로 시간을 체크하지 않고 매일 한 장씩 뜯는 방식으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심지어 달과 요일이 독일어로 쓰여 있어서 같은 날짜도 낯설게 느껴진다. 다가올 한 해의 시간이 가로 5.5센티에 세로 8센티 정도의 종이에 적혀 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 무게와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또 한 번의 달리기를 마치고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기분이랄까. 내일이 없을 것처럼 오늘을 살기에 일력은 참 괜찮은 소비였다고 생각하다가 다른 이들은 각자의 출발선 앞에서 어떤 준비운동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영화처럼 시간 여행자의 삶을 살 수는 없어도 서로 다른 공간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함께 이번 생을 여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많은 명사 중 기쁨과 슬픔이 ‘나누다’는 서술어와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올해는 유독 힘들었다고, 잘 되는 일이 없었다고 투정 섞인 말을 할 때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에게 올해도 고생 많았다고,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순간에도 감정을 나누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아까워서, 시간이 두려워서, 모든 시간을 부정하더라도 시간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라고.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팀의 대사가 그러했듯 “행복의 공식을 늘렸다”라고 자신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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