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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an 15. 2018

나, 보통의 존재



어른들은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한 삶이라는 말을 줄곧 한다. 그저 가족들이 건강하고, 밥 굶지 않고 사는 일에 행복을 느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어른들이 말하는 행복의 공식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의문이 생긴다. 평범하다는 건 특별하지 않음을 내재하고 보통이 지향하는 것들을 끌어안는다. 표준 국어 대사전에서는 ‘보통’을 ‘특별하지 아니하고 흔히 볼 수 있음. 또는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라고 명시한다. 보통은 참 뜻도 애매하다. 매운 음식을 고를 때 순한 맛, 중간 맛, 매운맛이 있어서 중간 맛을 선택한다 해도 매움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듯이 ‘보통’도 어디까지가 그 말에 맞는 기준인지 명확하지 않다.


매일 씻고, 음식을 먹고, 일 하고, 잠들고 깨어나는 수많은 항상성이 일상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흐름이다. 어릴 때는 잘 씻고, 잘 먹고, 제 때 일어나야 한다는 것부터 배우면서 일상의 기본기를 내재화한다. 사회에 나가면 더 많은 학습이 기다리고 있다. 직장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절, 호칭, 선후배 문화 등 함께 살기 위해 숙지해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친다. 결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말이 새로운 평균을 만들어낸다. 어떤 규범을 알게 되고, 강요받는 일은 또 다른 ‘보통’을 양산한다. 어차피 특별하고 흔하지 않은 것을 선택할 기회는 자주 찾아오지 않고, 희귀한 사건을 만들 용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누구나 받아들일만한 생각을 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가끔은 나다움을 잊고 보통을 취하는 게 편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따라붙는다. 보통의 일반적인 면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으면서도 꽤 단단한 성질이 있어서 나다움을 근거로 모순을 따지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다.   


항상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는 대상은 자연이다. 자연이 집인 생명체는 계절에 맞서지 않고 스스로 적응하는 방법을 취한다. 황제펭귄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천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더 추운 곳으로 무리를 지어 여정을 떠난다. 살기 위해 더 혹독한 환경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다. 황제펭귄 무리가 겨울을 나는 모습은 마치 광장에 모인 군중과 흡사하다. 광장의 군중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목적이 다르지만 황제펭귄은 오직 추위를 함께 견디기 위해 모인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서서 일제히 서로의 등을 의지한 채 앞에 선 펭귄의 체온에 기댄다. 앞 쪽에 있을수록 뒤에 있는 펭귄들 덕에 따뜻하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추울 수밖에 없다. 신기한 건 앞 쪽에 있던 펭귄들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뒤에 있는 펭귄 쪽으로 가서 바깥을 자처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가 더 따뜻하고 춥고 할 겨를 없이 추위를 겪고 체온을 나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함께 살기 위해 움직이는 황제펭귄의 삶의 방식에는 교훈이 있다. 황제펭귄이 본능적으로 추위를 피하려고 모이는 것을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무의식적으로 만든 평범함, 보통, 일반적인 성질이라 가정한다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이 보통의 범주 밖에 있는 나다움이다. 나다움은 주체적으로 자신만의 생각과 관점을 가진다는 걸 의미한다. 그 조차도 없다면 사람들이라는 무리 안에서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나다움 없이는 황제펭귄처럼 자신의 체온도 타인과 나눌 수 없다. 보통의 논리가 있기 전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심지는 남겨둬야 한다.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회광반조(回光返照)’는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는 일의 중요성을 뜻한다. 타인의 마음을 묻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근본이 된다면 마음에 가라앉은 나다움의 자리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생멸하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유하고 소통한다는 이유로 정신적인 욕구를 가진다. 살 곳, 먹이, 천적에 대한 주의 등 생존을 위한 최소한만 있어도 살 수 있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생명활동을 근간으로 삶의 이상을 바라고 지키려고 노력한다. 그 욕구는 이해관계를 만들고, 다름은 다툼을 유발한다. 왜 내 생각과 같지 않은지, 누구나 허용할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갈등은 각자가 생각하는 ‘보통’에 대한 반란이다. 어릴 때는 별 이유도 없이 나를 때린 친구를 똑같이 때리기 위해 무작정 쫓아가지만 어른의 갈등은 각자의 입장을 가장 일반적인 것이라 우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관계는 각자가 알고 있는 상식의 선과 주관적 경험을 바탕으로 아슬아슬한 곡예를 이어간다. 감정이 얽힌 일에 평균의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싸워 본 적은 있어도 제대로 싸웠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세상에 혼자뿐이라면 보통을 산출할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함께 산다는 전제가 아니고선 평범하다는 말도, 보통도 흔한 그 무엇이 되지 못한다. 보통, 평범함, 일반적인 것은 사람이 부대끼며 살다보니 만들어진 틀이다. 법처럼 엄격하진 않아도 보이지 않는 규범처럼 여긴다. 함께 둥글게 살아가기 위한 좋은 기준이기도 하고, 개개인의 특성과 관점을 의아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는 버거운 틀이기도 한다. 그래서 평범하고 보통이고 중간인 것은 어렵다. 어찌 보면 어른들이 강조하는 평범함의 행복은 나다움을 지키는 것과 공존 사이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결과로 내린 모범 답안일지도 모른다.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아니한 중간 정도’라는 애매한 뜻처럼 보통을 산다는 건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해줄 수 없기에 오직 ‘나’만이 만들 수 있다. 나로서 우리로서 지나치지도, 소홀할 수도 없는 보통을 살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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