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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an 22. 2018

소리 일기


매일 듣는 소리가 있다. 현관문 여닫는 소리, 층과 층 사이 승강기가 멈추는 소리, 부재중인 집에 들르는 택배기사의 외마디, 위층의 생활 소음, 육중해진 쓰레기차가 동네 곳곳을 누비는 소리, 바퀴 달린 시장바구니를 끄는 소리, 도로를 밟고 지나는 자동차 소리 등. 아파트에 살면서 듣는 소리뿐 아니라 함께 살다 보니 필요에 의해 서로를 부르는 소리까지 더하면 꽤 많은 소리에 노출돼 있다. 소리는 물성은 없지만 물성이 있는 모든 것끼리 부딪히고 마주하여 드러난다. 그래서 소리는 그 자체로 직관적이다.


일상의 소리를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 왔다. 그러다 1년 전, 위층에 아이가 있는 부부가 이사를 오면서 소리에 대한 생각에 이상이 생겼다. 일주일이 넘는 인테리어 공사 후 잠잠해지다시피 한 어느 날 위층 내외가 케이크를 들고 찾아왔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만삭에 가까운 몸이었고 남자 옆에는 서너 살로 보이는 아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던 중 남자가 갑자기 “조용히 살겠습니다.”라고 하며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닌가. 순간 당황해서 뭐라 말도 못 하고 문을 닫았다. 죄지은 사람이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러겠다는 선포로 들렸다. 그 날을 기점으로 소리의 공포가 시작됐다.  지은 지 20년을 넘긴 아파트의 방음 문제와 더불어 낮부터 오후 늦게까지 이어지는 불규칙한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가 집 안을 온통 휘젓고 다니는 소리, 까무러치게 웃고 우는 소리가 매일 반복됐다. 처음엔 경비실 호출을 통해 주의를 줬지만 그때 뿐이었다. 예전에 뉴스에서 층간 소음으로 이웃끼리 싸우고, 칼부림까지 난 일을 연일 보도할 때도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소리에 민감해진 탓에 출퇴근 버스에서 평소 싫어했던 소리가 더 괴롭게 느껴졌다. 입 안에서 껌을 부풀리다 터뜨리는 소리, 지나치게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소리, 아저씨들이 잇새에 낀 이물질을 빼려고 내는 쩝쩝 소리가 돌아가며 나를 괴롭혔다. 소리를 내는 주체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외출을 할 때 이어폰을 가지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다. 볼륨을 높이고 귀를 틀어막아도 소리의 폭력에서 해방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보여도 보이지 않고, 들려도 들리지 않는 정신 상태를 구축했다는 착각에 빠졌다. 가끔 밖에서 아는 사람이 부르거나 지나가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분명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알아차리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렇게 소리에 관해서라면 피해자를 자처하거나 습관성 방관자가 되기도 했다.    


며칠 전 태백에 있는 자연 휴양림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휴양림에 가기 전 먼저 동해 바다에 들렀다. 차로 세 시간 남짓 달렸을 뿐인데 일상의 소리는 소거되고 바람과 파도, 갈매기 소리만 들렸다. 버티면서 감내해야 하는 소리가 없다는 것만으로 홀가분했다. 흐늘거리는 바다를 실컷 보고 바닷가 앞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평일에다 점심을 훌쩍 넘긴 시간이라 객은 우리뿐이었다. 처음으로 곰치국을 먹었다. 칼칼한 김칫국에 푹 익힌 생선의 구수함이 어우러진 맛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곰치국을 먹어 봤는지, 맛은 있는지, 점심인지 이른 저녁인지 궁금해했다. 뜨끈한 국물과 함께 오가는 몇 마디 대화가 오로지 배를 채우기 위한 끼니가 아닌 여행의 맛으로 느껴졌다.  


휴양림은 산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통나무집에 들어서자마자 왼편으로 숲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창이 보이고, 창문을 열면 이어지는 나무평상도 있었다. 대충 짐을 놓고 바라본 산자락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고, 맞은편 숲길 사이에는 잔잔하게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바닥이 너무 따뜻해서 한 숨 달게 자고 일어나니 이미 밤이었다. 옷을 든든하게 입은 후 헤드 랜턴을 끼고 숲길 산책에 나섰다. 불 켜진 몇 동의 집을 지나 호젓한 숲길을 마주했다. 풀벌레도 동면에 들어갔는지 소리라고는 언 눈길을 밟는 소리가 전부였다. 랜턴의 불빛은 나의 반경 안에서만 시야를 허용했고, 날숨이 찬 공기와 만나 뿌연 입김으로 피어올랐다. 길을 둘러싼 나무는 낮에 보던 것과 달리 밤의 채도를 더 짙게 드리우며 숲길을 엄호했다. 그야말로 완전한 적막에 놓였다. 소리에 시달려 소음으로부터 해방을 소원하던 시간은 온데간데없고 지독한 고요를 가를 어떤 소리를 바랐다. 먼저 친구에게 말을 걸며 적막을 깬 건 나였다. 소리의 한계가 소음이 되었듯 고요의 한계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불빛과 사람들이 있는 통나무집 쪽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둘째 날은 난생처음 아이젠까지 장착하고 설산에 올랐다. 함백산의 고준한 산길을 오르다 만난 등산객이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또 한참을 가다 만난 사람은 얼마나 가야 정상이냐는 질문에 거짓말이 아니라 조금만 더 가면 된다며 너스레 웃음을 짓기도 했다. 눈 밟는 재미에 기대어 걷다 보니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 1572.9미터. 까마귀 서 너 마리가 정상 주변을 배회하며 우는 소리와 험상궂은 바람소리가 온 산을 메웠다. 자연이 내는 소리는 소박하고 웅숭깊어서 아무리 들어도 비우는 소리에 가깝다.  



가끔은 듣는 일에도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소음은 축적되지만 소리는 본연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감각을 깨우고 마음에 자리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적막한 숲길을 걷고 고요한 산길을 오르내리며 스스로 소리를 모으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고 위층 아이의 쿵쿵대는 소리는 여전하다. 싫다, 괴롭다 하면서도 주변의 소리가 모두 무음으로 바뀌다고 상상하면 숲 속에서 적막을 만난 기분일지도 모른다. 곧 여행의 여운이 가시고 소리가 소음으로 바뀐다 해도 일상이라는 불협화음 안에서 찾아가는 리듬이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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