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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an 29. 2018

불안이 싫어서   

톰슨가젤은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안을 병처럼 앓은 적이 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목도한 것을 계기로 삶의 한가운데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아야만 할 시기였다. 불현듯 무엇이 되어야 한다거나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걱정은 뒤로하고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이 엄습했다. '나'라는 사람의 질량만큼 이 세상을 짓누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퇴근길 버스에서 바라본 아파트 불빛은 삶을 비추기도 하지만 언젠가 영원히 꺼질 불빛일 가능성을 생각했다. 밤잠을 설쳤다. 눈을 감아도 눈에 비치는 잔상이 두려웠다. 암막 커튼은 바깥보다 깊은 어둠을 몰고 사방을 두른 벽을 대동해 방 안을 좁혀왔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밤새 몇 번이고 거실을 들락거렸다. 창문을 열어 숨을 내쉬어도 폐에 칸막이가 있는 것처럼 어느 선 이상의 숨을 쉴 수 없었다. 다시 깜깜한 방에 들어갈 때면 무덤가에 몸을 누인 기분이었다. 가없는 적막 속에서 오로지 옆 사람의 숨소리와 체온에 기대지 않으면 잠들 수 없는 나날이었다. 긴긴밤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아침이 왔다. 오히려 아침이 꿈이 되는 시간이었다. 불안이 몸의 신호로 나타났다. 가끔 불규칙하게 가슴이 아팠다. 무언가 쿡쿡 찌르는 느낌이 선명하게 인식될 정도였다.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진단 결과의 확실성 때문인지 축적되어 가는 불안을 시간이 덮어 준 덕인지 점점 증상이 사라졌다. 숨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아무튼 살아있고, 살아가야 한다는 명제가 슬픈 현실이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 나라에 유감없는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는 자식을 잃고, 부모와 선생님을 잃어도 또다시 불안이 재생되는 안전 불감증 나라에서 말이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은 제대로 숨 쉬며 살고 있을까.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서 ‘계나’는 제목 그대로 한국에서 살기 싫어서 호주로 이민을 결심한다. 지하철 2호선의 끔찍한 통근 시간, 점심 메뉴조차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일률적인 회사 업무, 만났다 하면 회사나 시어머니 욕만 하는 친구들, 형편이 나아질 기미가 없는 부모, 커피숍에서 알바를 하는 언니, 몇 년째 공무원 준비를 하며 무명의 기타리스트와 연애를 하는 동생까지. 계나 주변은 도무지 바뀔 기미가 없는 것 투성이고, 그런 요소가 한국의 불안요소로 비친다. 특히 자신의 처지를 동물에 빗댄 부분이 묘하게 인상적이었다.



아프리카 초원 다큐멘터리에 만날 나와서 사자한테 잡아먹히는 동물 있잖아. 톰슨가젤. 걔네들 보면 사자가 올 때 꼭 이상한 데서 뛰다가 잡히는 애 하나씩 있다? 내가 걔 같애.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고 여기는 그늘이 졌네, 저기는 풀이 질기네 어쩌네 하면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다가 표적이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그런 가젤이라고 해서 사자가 오는데 가만히 서 있을 순 없잖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은 쳐 봐야지. 그래서 내가 한국을 뜨게 된 거야.  「한국이 싫어서」中


어릴 때부터 강요된 공부로 꿈이 표백되고, 자신의 특색이 뭔지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도 길을 잃는다. 타고난 재력, 외모, 지위가 없으면 아무 회사든 일벌레가 되어 정시 퇴근과 주말 없이 살고, 바쁘게 사는 게 당연해서 계속 힘내야만 하는 삶. 하나의 성취가 가치 있는 성과가 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적의 잣대로 평가절하 되고, 사람에 대한 질문보다 직업, 나이, 집의 위치, 평수, 차종, 부모님의 직위나 재산 등의 이력을 묻는 게 먼저인 나라. 정치인의 특권 의식과 비리가 끊이질 않고, 양심 없고 돈 있는 사람이 청렴하고 가난한 사람보다 당연히 잘 살 수밖에 없는 구조의 악순환. 지나친 선후배 의식과 꼰대 문화까지. 한국에서 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대라면 끝도 없다. ‘시발 비용’, ‘탕진 잼’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가 내면화된 사회 구조에서 계나가 무리를 이탈한 톰슨가젤처럼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을 유별난 행동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한 일은 존중받아야 한다.


책의 말미에서 문학 평론가는 계나가 행복해질 수 없다고 전한다. ‘야생’과 ‘가축’의 양단을 견주며 한국 사회에서 산다는 건 알게 모르게 침윤된 ‘가축’의 삶이고, 외국은 또 다른 ‘가축’으로의 삶의 이동에 불과하다는 판단이다. 어느 사회든 불치병처럼 내재된 악순환의 고리는 존재할 것이다. 다만 악순환의 고리를 알면서 사육당하는 가축의 삶을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평론가는 ‘이탈’이 아닌 ‘연대’를 통해 가두는 대상을 물리치고 벗어나는 것을 방안으로 내세운다. 이는 계나의 한계이자 무기력한 개인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말마따나 언제까지 사자가 무섭다고 도망칠 노릇도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계나같다면 사회와 개인은 아무런 연대 없이 맞닿으면 부서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계나는 잠시 들른 한국을 떠나며 “난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한다. 결국은 행복 찾기다.


삶의 불안은 도처에 널려있다. 사람이 병에 노출되면 원인균을 알기 위해 몸에 맞는 항생제를 찾기 시작한다. 항생제가 들지 않으면 미열은 계속되고, 몸의 다른 기능들이 약해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수많은 원인균에 딱 맞는 항생제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병을 고치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불안을,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병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항생제를 무력한 개인이 찾는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계나의 선택을, 불안을 병처럼 앓고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조용히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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