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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Feb 12. 2018

어떤 대화를 하십니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에서는 그가 본 영화의 인상 깊은 대사인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는 말이 나온다. 노인의 대사 후 아이가 채소는 무엇인지를 묻지만 딱히 답을 내리지 못하는데, 하루키는 이런 대화를 좋아한다고 한다. 나는 꿈을 좇지 않는 인생에 빗댈 채소를 생각하다가 숨이 죽어 한 꺼풀씩 벗겨져도 최후에 단단한 심지는 남을 양배추를 떠올렸다. 그러다 옆 페이지의 각주에 ‘일본의 야마노테 선의 노선도는 피망 모양입니다’라고 적힌 걸 보고는 웃음이 났다.


용두사미식 대화를 좋아한다는 하루키는 말미에 묘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고 하며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채소가 뭐 어쨌다는 건지 괜히 미안해졌다. 애초에 꿈으로 향하지 않는 삶을 ‘채소나 다름없다’는 것으로 몰아넣는 것 자체가 왠지 편협해 보인다. 그렇지만 멋진 대사라는 하루키의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꿈이든 당장의 일이든 그것이 질문이 되면 답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이 생긴다. 다만 답으로 드러나는 동시에 단정적인 결과가 되어 다른 답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있다. 생각건대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용두사미식 대화는 처음에는 목적을 갖고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아서 결국 어떻게 생각하고 말해도 그만인 것 같다. 한마디로 대화의 열린 가능성이다. 사실 이런 대화는 흔치 않다.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상대에게 질문을 하거나 받게 되는데 의도가 순수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질문을 하는 쪽이 원하는 답을 염두하고 던지는 대화는 즐겁지 않다. 순전히 상대의 생각을 묻기 위한 대화가 아닌 자신의 생각을 굳히기 위한 대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상대가 원하는 답을 하지 않을 경우 “왜?”라고 하는데 이는 “당신은 왜 내 생각과 같지 않은가?”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질문을 한쪽도 받은 쪽도 심기가 불편하다. 질문자는 스스로 만든 사고 체계 안에서만 노닌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질문의 주도권을 쥐려고 하며,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묻고, 기대하는 답을 찾으면 그 또한 자신이 역할을 한 걸로 여긴다. 참기 힘든 건 질문자는 항상 모든 상황에 답을 내려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상대가 스스로 부딪히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질문자는 아무도 대화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결국 외로움을 자처한다. 웬만하면 나이 먹을수록 이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    


타인의 경험을 자신이 아는 대로 일반화하는 사람도 경계의 대상이다. 편협한 질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경험하고 아는 범위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타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주변 지식도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부러 묻지 않는다. 가끔 상대방에게 잘 듣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하지만 결국 궁금한 건 이야기의 결론이다. 이런 유형은 고통에 처한 상대에게 힘내라는 가짜 위로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가짜 위안도 되지 못한다. 모든 대화는 자신의 경험에 대입해서 산출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으며 상대방의 생각과 이야기를 쉽고 간단하게 뭉뚱그리기에 능하다. 다만 너무 티가 나서 상대의 공감을 얻어내진 못한다.   


좋은 인터뷰어는 인터뷰이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왜?”라는 질문은 대화나 질문을 하기 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왜 묻고 싶은지, 상대에게 하고 싶은 말에 담긴 스스로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면 기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다. 헐렁한 대화 안에는 주도권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다. 자신에 대한 물음과 상대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 언제든 들을 수 있다는 마음만으로 가능하다.


앞서 책에서 언급한 영화 대사에 이어 하루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채소를 이야기하고, 예전에 카페를 운영하던 시절 지겹게 만든 양배추 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쯤 되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싶지만 어떤 내용으로 이어질지 모르는 즐거움에 문장을 놓을 수 없었다. 대화도 그렇게 흘러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목적을 좇지 않는 대화는 과일이나 다름없다”라고 패러디를 한다면 하루키는,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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