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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an 08. 2018

변하지 않는 루틴

일상 탐구 2탄



<아침 커피>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암막 커튼을 걷어서 빛의 채도를 보고 날씨를 가늠한다. 흐려도 괜찮지만 맑은 날씨라면 더 좋다. 아직 소음이 떠다니지 않고 새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는 오전 시간은 여기가 도심이고 아파트라는 사실도 잠시 잊게 한다. 햇빛이 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는 오전 시간을 하루 중 가장 좋아한다.

우선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고 드르륵 소리를 내며 곱게 갈아준다. 원두 알갱이가 끝을 보일 즈음 미리 물을 끓이면서 필터 한 귀퉁이를 접어둔다. 주둥이가 긴 핸드드립 전용 주전자를 직각에 가깝게 든 후 살짝 기울여 물줄기를 둥글린다. 곱게 갈린 원두가 뜨거운 물을 만나 발효되듯 부풀어 오른다. 여기서 최대한 물을 가늘게 내보내는 것이 포인트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천천히 물을 떨어트려야 한다. 스스로 내린 맛있는 커피의 기준은 천천히 만든 커피다. 시간 여유가 있는 날에는 커피 주전자를 워머에 올려놓고 잔에 커피를 조금씩 채워가며 마신다. 커피가 따뜻한 동안에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는 착각이 든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어도 커피를 마실 땐  잠시 시간을 유예한 듯 게으름을 즐긴다.

덕분에 원두를 고르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처음 원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마포에 있는 한 커피숍 때문이다. 그곳은 직접 커피 농장과 계약을 맺고, 가져온 원두를 그 자체로 싱글 오리진으로 제공하거나 서로 다른 국적과 농장에서 가져온 여러 원두를 배합해서 조화로운 맛을 만든다. ‘잘 되어 가시나’, ‘서울 시네마’ 같은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된 원두의 이력을 보는 재미도 있고 산미, 달콤함, 뒷맛의 정도를 수치로 쉽게 알려줘서 고르는 재미도 있다. 커피를 잘 몰라도 말린 과일, 곡물, 캐러멜, 아몬드, 초콜릿 등 배합된 원두의 향을 상상할 수 있도록 적힌 재료들은 맛보지 않은 커피의 맛과 향에 대한 기대치를 높인다. 구입을 하는 과정에서 상상한 맛이 더해진 덕분에 직접 원두를 갈아서 내린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이 즐거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닌 커피를 나누는 사람과 함께일 때 더 값지다. 커피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시간은 잔이 머금은 온도만큼이나 따뜻하다. 아니 그 이상의 잔잔한 기쁨이 있다.




<기록 하는 일>  


중학교 때부터 다이어리를 써왔다. 처음엔 일기를 쓰지 않고, 주변 사람의 생일을 기록하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노랫말을 베껴 적는 정도였다. 당시엔 스티커 사진을 찍는 게 유행이어서 다이어리의 남는 공간에는 늘 스티커 사진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친구들과 휴대전화 메시지로 소통하던 때가 아니라서 엽서나 편지를 쓸 때 다양한 펜이 필요했다. 워낙 펜과 스티커, 종이로 된 것들을 좋아해서 매일 문방구에 들르는 건 귀가 전 필수 코스였다. 빈 종이를 마주하고 앉아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쓰는 시간이 좋았다. 물론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생각했던 단어 선택이 잘못됐다는 이유만으로 낭비한 편지지 양도 꽤 될 것이다. 휑했던 여백이 꾹꾹 눌러 담은 글씨로 가득 채워지는 게 흐뭇했다. 전하려 했던 말이 많은 것도 아닌데 편지를 쓸 때면 늘 칸이 부족했다. 깜지처럼 채워진 편지를 뿌듯하게 훑어보고 삐뚤지 않게 접어서 봉투에 넣을 때의 든든함이 있었다. 답장은 언제든 다시 쓸 이유를 제공했다. 또 무언가를 적기 위해서 편지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의 편지는 내겐 또 다른 형태의 일기였다. 지금까지 꾸준히 매일의 일과와 생각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친구들과 나눈 편지와 쪽지의 즐거움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책과 마찬가지로 활자로 적힌 모든 것에는 생명체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호흡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누군가와 나눈 기록에는 숨이 붙어 있어서 불현듯 기억이 세포 반응을 한다. 오랜 시간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작은 쪽지도 사물로 여기고 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요즘엔 받을 사람이 정해진 편지를 쓰는 일이 별로 없지만 다이어리에 하루의 일과를 기록하거나 놓치기 아쉬운 순간을 그러모으기 위한 글을 쓴다. 어쩌면 불특정 다수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한다. 한 해가 마무리될 때면 다이어리를 다시 읽어본다. 시간이 있다면 작년 것도 다시 읽어보고 비교한다. 다른 듯 너무 똑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지긋지긋하다가도 결국에는 웃음이 터진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더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기록은 담담하게 인생 영수증 역할을 한다. 기록은 지금을 사는 일을 충실하게 증명할 뿐이다. 기록만이 ‘나’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방법임을 세월이 흘러 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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