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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r 19. 2018

계속 하겠습니다


내가 가진 몇 안되는 습관 중에 꾸준히 질리지 않는 게 관찰이다. 매일 다니는 길목에서 만나는 나무의 사계절과 작은 돌 틈, 노선도에 따라 움직이는 버스와 지하철 바깥의 풍경, 시장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좋다. 주변의 바탕색을 관찰하는 일은 새롭다. 습관이라는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호사는 관찰이 아닐까. 관찰은 상상을 수반한다. 가끔은 꿈을 기록하는 일이 관찰의 연장선상이 되기도 한다.


시간의 절구에 쌓고, 빻고, 덜어내면서 아무리 씻어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냄새가 있다. 오랜 것은 첫인상의 강렬함이 아니라 시간으로 빚어진다. 아마 그런 종류의 빚어짐은 습관으로 확인되거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게 새로운 익숙함을 발견하거나, 필요 없는데도 버릴 수 없는 물건에서 느낄 수도 있다. 습관은 무섭다. 일부러 노력한다고 한들 관성으로 지배된 습관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그럴 땐 습관을 탓하기보다 이해하는 편이 나았다. 습관의 잘잘못을 떠나 일상을 관찰하는 건 질리지 않았다. 사람은 질리지 않는 걸 꾸준히 반복하면서 그저 보는 일에서 발견을 향해 갈 수 있다.   


일 때문에 분당선인 모란역을 중간 거점으로 다닌다. 4일과 9일이 들어간 날에 모란장이 열린다. 장날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연세 지긋한 분들이 많아서 빨리 걷고 싶어도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출구 계단 끝에 서서 관광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를 지나면 가판에 아욱, 감자, 오이, 사탕 등을 파는 할머니와 떡을 파는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있다. 할머니들 가판 뒤쪽으로는 열쇠와 도장을 취급하는 아저씨가 신문을 뒤적인다. 한 번은 급하게 막도장을 팠는데 능숙하게 도장을 만들어 종이에 찍어 보이는 아저씨가 멋있어 보였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면 편의점과 병원, 약국이 있는 큰 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늘 휑해 보이는 아웃도어 매장이 독립된 건물로 있다. 그들 건물 사이에 터를 잡고 양말, 장갑, 토시를 파는 아주머니의 자판이 있고, 옆 건물 1층에는 큼지막한 양은솥에 쪄내는 만두가게가 있다. 정류장에 서 있는 짧은 시간에 만두 가게에서 퍼지는 뿌연 김을 보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괜히 군침이 돈다. 어쩌다 보니 이곳을 드나든 지도 8년이 지났다. 모두가 오랜 시간 이 곳을 스치며 만난 풍경이다. 이제 출구 앞에 가판 할머니들이 없거나, 빌딩 사이가 비어 있으면 걱정이 될 만큼 누군가의 하루 풍경이 익숙해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빛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늘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수수하고 반들반들한 빛깔을 느낀다. 장사가 되지 않아도, 돈이 안 돼도, 최저 임금을 받는다 해도 최저의 인생은 아니다. 우후죽순 생기고 사라지는 점포 사이에서 길거리에 앉아 반찬통에 꾹꾹 눌러 담아 온 한 끼를 밀어 넣으며 하루를 바지런히 사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노동의 인내와 가치를 배운다. 삶의 굳은살은 반복된 습관으로 다져진 든든한 재산일 것이다. 나로서는 관찰한다고 해서 배울 수 없는 내공과 연륜을 감탄하듯 바라볼 뿐이다.


매일을 습관처럼 산다는 게 무엇일지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들은 삶에 빚을 지고 있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 게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가정이 있고,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게 그들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습관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나는 누구나 일정 부분 사랑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좋든 싫든 낳아주신 부모에 대한 빚, 애정을 갖고 바라봐주는 사람들에 대한 빚,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말에 용기를 얻었을 때의 빚, 오늘 하루도 힘내라는 말속에 담긴 빚처럼 온갖 빚더미에 앉아 있어서 또 하루를 살아가는 건 아닌지. 불행한 사람은 하늘을 천장 삼아 살아서가 아니라 사랑에 빚을 지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고.


가끔 로또를 산다. 로또 1등이 되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걸 해주고 남는 돈으로 나도 행복해질 상상을 한다. 통장에 그 어마어마한 숫자가 찍히는 날, 모두 다 갚겠노라고. 사랑의 증거를 보이겠노라고 술김에 큰소리도 쳐봤다. 다만 한 방에 갚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아무래도 로또가 될 확률이 낮으니 위안뿐인 말보다 평생 빚을 갚으며 살 수밖에 없다. 주변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필 수밖에. 고맙고, 아쉽고, 미안한 마음은 쌓이지 않고 서로의 눈빛에 스며들 뿐이다. 관찰이라는 습관을 멈추지 않다 보면 삶의 순간순간 새롭게 알게 되는 뭔가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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