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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pr 23. 2018

어떤 단편을 읽다가



굴에 관한 재밌는 단편이 있다. 모스크바의 어느 거리, 어린 소년이 아버지와 구걸을 하다가 주점 간판에 적힌 ‘굴’이라는 단어를 보게 된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굴에 대한 호기심은 극한의 굶주림과 함께 온 감각을 곤두세운다. 먹지 못하는 상황이 간판의 텍스트와 맞물려 절박함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굴을 입 속에 넣게 되는데 그 맛이 악몽으로 나타날 만큼 끔찍했다는 이야기이다.


안톤 체호프의 초기작인 「굴」은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의 가혹함을 미각적으로 형상화한 단편이다. 기아(飢餓)의 상황에서도 먹을 것이 공포가 될 수 있다는 역설이 신선했다. 소설 구성의 재미는 곧 끝나고 씁쓸함을 느낀 건 ‘굴’이 단순한 음식이 아닌 모든 경험의 영역을 포괄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른이 된 소년에게 수많은 굴에 관한 기억은 어떤 자국을 남겼을지 상상해 봤다. 그리고 소년이 경험한 게 굴이 아니라 사람이면 작가는 어떤 전개를 펼쳤을지도 궁금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 나를 모르는 사람, 알지만 다 안다고 볼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구나 굴이 적힌 간판을 바라보는 소년의 호기심 같은 걸 안고 산다.


맛은 개인차가 있어도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직관적이다. 언어로 이해하는 형태, 향, 촉감만으로 상상할 수 없는 단정적인 면이 있다. 사람으로 따질 때  첫인상이 ‘이해’에 가깝다면 겪어보고 아는 쪽을 제대로 된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아직 많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분명 기회가 있었지만 이해의 영역에서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애매한 표현을 하는 건 관계는 혼자 이룰 수 없고, 내 쪽에서 먼저 닿지 않으면 흘러가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 때는 친하다는 것을 무기로 상대의 허점을 건드리는 말을 서슴지 않기도 했다. 맛은 바로 맛으로 알듯 관계는 말로 맺어지고, 단절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음식의 맛과 사람의 관계. 이 둘은 전혀 다른 속성처럼 보여도 언제나 판단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후자가 더 어렵다. 소년에게는 굴을 맛본 첫 경험이 끔찍한 사실이 되었듯 우리가 일상에서 반복하는 경험의 범주가 늘 고르지만은 않다.


최근에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냐.”는 말을 들었다. 가족에게 들은 말이라 더 충격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강요받은 것도 서러운데 살아온 이력까지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화가 나서 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따끔거렸다. 결국 싸움은 내가 바라는 상대의 모습이 아닐 때 부글부글 끓다가 넘치는 일 아닌가. 나는 상대가 바라는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잘 살아왔다는 말이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 했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하는 게 중요했다. 애정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의 모습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의 범주로 묶는 건 욕심이고 집착이다. 요리의 재료로 치자면 사람을 대할 때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원재료인 ‘나’이고 싶다.




사람들은 용케 마음의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어떤 삶의 방식을 놓고 자신과 타협하고, 그것의 나쁜 면을 인정하되 좋은 면만을 보려고 애쓰면서, 아침마다 스스로를 달랜다. 다시 그것이 허사가 되면서 마음의 곡예는 계속된다.  「밑줄 긋는 남자」 中



‘마음의 균형’이라는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곡예’에 가까운 만남을 겪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문장을 배열하고, 대화를 넣고 사건을 전환하면서 내용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누군가와의 만남은 치열한 삶의 흔적으로 남기도하고, 평생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한편으로 만남을 통해 형성되는 가치관이 알게 모르게 신체와 정신에 흐르고 있다. 관계라는 물살에 순응하되 중심을 잡고서는 일은 스스로의 몫이다. 자세가 멋있지 않아도 중심을 잡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솔직함을 무례함이라고 치부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가 안 되는 시선으로 보는 사람에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마음의 균형을 찾는데 도움이 됐다. 상대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둘러대고, 감추는 게 당장을 모면할지 몰라도 자신의 마음은 유보하는 것이다. 유보된 마음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건 스스로에게도 못할 짓이다.


소설 「굴」은 참담한 맛에 대한 서술을 길게 이어가지 않아서 인상적이었다. 결말을 끌고 간 내용의 8할이 굴에 대한 관심이다. 소설은 그쯤에서 끝이 났지만 뭐든 경험하기 전에 인간이 이끌어 낼 수 있는 상상의 최대치가 있다는 걸 보여줬다. 왠지 소년은 어른이 되어 지난 시절을 추억하며 굴을 먹을 것 같다. 음식도, 사람도 기대와 그 결과가 모순을 이룰 때 찾아오는 균형의 역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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