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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pr 30. 2018

4월을 기억하는 방식


한 달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게 기억된다. 어떤 이에게 4월은 봄이 완연하기만 한 계절이 아닐 것이다. 생장점을 뚫고 선 가지에 잎이 마주나고, 잎맥에 수분이 차오르는 계절, 겨우 터뜨린 꽃이 만면에 미소를 띨 때 누군가는 잊을 수 없는 이의 웃음소리를 기억한다. 온갖 성장의 소란 안에서 사랑의 감정은 계절을 비웃듯 죽지도 않고 피어난다. ‘잊지 않을게요.’를 적은 해시태그로 가득하던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4주기였다. 잊지 않겠다는 건 잊지 않았다는 확인으로 증명되었다. 새끼 손가락을 걸지도, 도장을 찍지도 않았지만 분명 사람들은 2014년 4월 16일에 약속했다.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자체여서가 아니라 그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요동치다 바다 깊이 묻어 놓은 그리움 때문이라고. 언제든 저만치 멀어지다가도 다시 밀려오는 슬픔일 거라고 말이다.


슬픔의 주체였던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의 목소리가 되고 광장의 눈이 된 시간을 겪었다. 사실 무언가를 겪었다고 표현하기에 나는 소극적인 한 개인에 불과했다. 질문하지 않던 시간이었다. 질문을 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반감이 생길 때마다 원래 세상은 그런 거라고, 그래서 달라질 게 뭐가 있냐고 했다. 행동하는 사람보다 관음적인 방관자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 물결에 의식을 놓치지 않고 흘러갔더니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 광장의 촛불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 촉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재난의 희생자로 명명되던 이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다.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 방식은 점점 더 구체화되었다. 그만큼 문학, 예술, 사회 전반과 개인의 삶에는 슬픔을 잊지 않으려는 의식 저변이 짙어졌다. 변화의 힘은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사람들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죄의식을 비롯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감이나 연민의 감정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 자신의 이해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테두리 밖에서 공감은 능력이기보다 무능력으로 잔인한 진실을 드러낼 때가 많다. 경쟁과 생존에 대한 강박이 날로 증대하는 세상 또한 그런 감정의 동력을 쉽게 앗아간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라도 한 사회는 공감과 연민에 바탕한 가냘픈 선의와 예의를 존중하고 증대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얼마 전 정홍수 작가의 산문집 「마음을 건다」의 ‘세월호와 문학의 자리’라는 제목을 단 글에서 오래 머물렀다.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상처의 깊이를 얼마나 객관화할 수 있는지 통렬하게 이해했다. 나는 고작 이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잠정적 거리에 놓여있다. 그게 이해의 가장 낡은 부분이다. 그럼에도 이해하려 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내 삶의 문제라는 가정으로 바투 가져다 놓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연대는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견고하지 못한 글이라도 써야 한다. 고통이 사는 일과 일상에 묻혀 끊임없이 타자화 되는 걸 견제하고 싶다.   


요즘 나의 가장 가까운 벗이 SBS에서 주최하는 서울 디지털 포럼(SDF)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정식 타이틀은 아니지만 ‘개인이 바꾸는 세상’을 주제로 매주 기자님들과 함께 기획· 취재를 하고, 영상을 제작하고 있다. 대학 시간강사를 거쳐 지금은 대리운전을 하며 망원동에서 글을 쓰는 김민섭 작가, 주물 공장에서 10년 동안 일하면서 매일 글을 쓰고 책을 발간한 김동식 작가, 현대를 사는 아버지를 주제로 잡지를 만드는 볼드 저널의 김치호 발행인 등을 만났다. 취재를 하는 그를 옆에서 바라보며 질문지를 살피고, 관련 책을 함께 읽었다. 흥미로운 건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모두 각자 표현 방식이 다를 뿐, 끊임없이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영상에 담긴 김민섭 작가는 직업에 따라 달라지는 호칭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알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데 적극적인 개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김동식 작가는 소설을 통해 변모하는 삶에 끊임없는 만약의 상황을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서술함으로써 가정된 현실을 ‘정말 그렇게 된다면’으로 사유케 하고 가늠하게 했다. 볼드 저널의 김치호 발행인은 잡지를 만든 계기부터 인상적이었다. 아버지이기도 한 발행인은 동료나 친구들에게 힘듦을 고백했을 때 “다 그렇게 사는 거야”라는 말을 듣고 의문이 생겼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아버지는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반감과 질문이 잡지를 매개로 고유한 인간의 정체성을 밝히는 목소리가 된 것이다. 이런 개인들이 품은 질문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고 나아가 연대가 된다는 걸 느꼈다.


4월은 노란 리본, 바다, 세월호, 목소리, 연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달이다. 결코 30일이라는 숫자로 무성의하게 카운트하는 시간이 아니다. 4년 전 4월을 기억하는 와중에 판문점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든 두 정상의 짧은 만남은 4월을 기억하는 또 다른 풍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슬퍼하다가도 웃었을 것이다. 때로는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수 있다. 아름다움은 기쁨, 슬픔이라는 단어를 포용하는 너른 언어라 그런 것 같다. 요즘 바깥에는 수많은 꽃씨들이 흩날리며 유랑을 한다. 가볍게 너풀거리는 씨앗은 생명이 움틀 땅에 닿기를 소망할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어디에 닿는다 해도 최선을 다해 유랑할 것이다. 어디든, 누구에게든 닿기를 소망하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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