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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y 07. 2018

여행과 일상


시간에도 결과 질이 있다면 지금을 어떻게 보내고 있느냐를 따지게 된다. 일인칭의 시점을 살더라도 여행을 하는 상황이라면 개념이 조금 달라진다. 세상에는 떠나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널려있다. 여행자는 ‘알 수 없음’에 놓여있다는 것만으로 시간의 결이 확장되는 걸 느낀다. 일상의 목적지와 여행의 목적지는 성격부터가 다르다. 일상이 평면적이라면 여행은 입체적이다. 어떤 장소에 이르기 위한 모든 발걸음이 도착이나 다름없다. 교통 표지판, 이정표, 간판, 집 앞의 화단, 심지어 마트의 물건들까지도 시선을 붙든다. 평소보다 몇 배를 걸어서 다리가 퉁퉁 부어도 신체적 피로 정도는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로 쉽게 전환된다. 다행히 짧든 길든 여행을 다녀오면 일상을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당위성이 생긴다. 여행 준비로 널브러진 집 안의 물건들을 제자리에 두고,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고, 여행 가방을 깨끗하게 비워 창고에 넣어둔다. 떠남의 감각이 채 가시지 않은 기분으로 침대에 몸을 누이고, 베개에 머리를 묻을 때 느끼는 편안함은 생경하면서도 다정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행지의 주인공이던 나는 일상의 수많은 주인공 사이에서 스스로가 부여한 역할을 수행한다. 평소의 시간은 여행과 같은 이벤트가 아니다. 여행과 일상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루를 채우는 줄거리나 사건의 전개를 일정 부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행은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과 함께 마침표가 찍히지만 일상은 말줄임표였던 지점에서 문단을 바꾸고, 들여 쓰기를 한 후 문장을 이어가야 하는 성질이 있다. 또는 마음가짐에 따라 첫 문장이 될 수도 있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이 금세 피로하게 느껴지는 건 자꾸 뭔가를 이루려는 데 있다. 누구나 크고 작은 목표를 가지고 산다.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일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매일 일기를 쓰고, 계획을 세우는 걸 즐기는 나는 허투루 보낸 하루라도 쓰고, 이루지 못할 계획이라도 일단 적어야 직성이 풀린다. 영화, 책, 해야 할 일의 목록, 끊임없이 뭔가 써야 한다는 의무가 하루의 원동력이자 괴로움의 요소이다. 꾸준해야 한다는 강박,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몸과 정신을 움직이게 하고, 허탈하게도 한다. 거기에 통장 잔고와 일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목표라는 계단 한 칸을 슬로모션으로 오르고 있다고 느껴진다. 마음이 요구하는 속도와 행동으로 드러나는 속도는 늘 분절되고, 비껴나간다.   


어떤 상황에 지나치게 집중할 때 외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한 번은 밤에 자전거를 타다가 낯선 길에 접어들었다. 늘 다니던 길이라 능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에 없던 길에 멀뚱하게 서 있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주변의 가로등 불빛을 헤아리니 방향이 보였다. 다시 돌아 나와서 페달을 밟았다. 잠깐 헤맨 건데도 움직이느라 쌓인 피로가 가신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덕에 쉬지 않고 집까지 돌아올 수 있었다. 잠깐을 못 견딘 게 우스웠다. 자전거의 일 뿐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생각대로 되지 않는 작은 일들에 쉽게 휘둘리고, 일희일비한다는 걸 느꼈다. 일상의 피로는 무엇보다 매일 조금씩 스스로가 만들고 있다는 것도.   


마스다 미리의 만화 「주말엔 숲으로」에는 도시에서 번역 일을 하다가 숲에 살게 된 하야카와, 여행사에 다니는 세스코, 출판사에서 경리를 맡고 있는 마유미가 나온다. 세 친구는 따로 혹은 다 함께 숲에서 만나는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다. 카약을 타면서 방향을 잘 잡지 못하는 마유미에게 하야카와는 “손끝만 보지 말고 가고 싶은 곳을 보면서 저으면, 그곳에 다가갈 수 있어”라고 한다. 밤의 숲길을 걸을 때 헤드라이트를 비추는 법을 몰라 제대로 걷지 못하는 세스코에겐 “어두울 때는 발밑보다는 조금 더 멀리 보면서 가야 해”라고 한다. 숲에 사는 친구와 나눈 시간과 대화는 도시에서의 ‘나’를 되짚어보는 데까지 이어진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은 한 치 앞의 사소함이 모이고 모여 저마다의 삶의 방식이 된다.


일상의 권태가 한도를 초과할 때쯤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고 짐을 싸서 떠난다. 여행으로 쌓인 홀가분한 정신적 마일리지로 다시 일상을 보낸다. 한편으로 여행은 또 다른 일상의 축소판을 몇 배속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한정적 시간이라는 이벤트 안에서 시간은 달리 보이고 마음의 여유 공간은 늘어난다. 아쉽지만 그보다 더 길고 질긴 건 매일의 연속이다. 캬악을 잡은 손끝이 아닌 가고 싶은 방향을 보고, 어두운 숲길을 잘 걷기 위해 눈앞보다 먼 곳을 비추는 일은 비단 특별한 방법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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