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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y 14. 2018

냉장고 일지



얼마 전 냉장고 정리를 했다. 냉장고는 이상하게도 매일 사용하면서 제때 청소하지 않는 물건이다. 오랜만에 작정하고 안에 있던 걸 꺼내보니 재료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반찬부터 겉은 멀쩡해 보여도 다 곪아서 만지자마자 으스러지는 야채, 곰팡이가 핀 음식과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음료, 언제 시켰는지도 모를 배달 음식까지 엄청난 양이 나왔다. 몇 번에 걸쳐 쓰레기를 버리고, 개수대에 쌓인 그릇과 통을 닦았다. 쓰레기든 음식이든 모조리 보관하고야 마는 냉장고는 투박하고 엄격한 모양을 가진 이미지로 신선 보관의 임무를 잘 수행하지만 그 사정은 주인의 관심 정도에 따라 다르다. 어떤 재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제대로 처리하는 일이 냉장고를 가진 사람의 몫이다. 입 속으로 들어가기 전 재료들의 임시거처인 만큼 열 때마다 유통기한, 냄새, 변색된 정도, 빛깔을 잘 살펴야 한다. 냉장고 청소를 하는 날이면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시원찮은 속사정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물건은 종량제 봉투에 꾹꾹 담긴 쓰레기와 비슷하게 실생활의 부끄러운 민낯을 증명하는 면이 있다.  


사과는 냉장 보관을 하면 몇 달이 지나도 그대로이다. 물론 맛도 그대로라는 건 아니다.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바로 먹을 때의 영양분은 사라지고, 과즙도 거의 느낄 수 없다. 그래도 배나 포도처럼 조금만 방치해도 무르고 곰팡이가 생기는 과일과 달리 “내가 뭐 어때서”라는 듯 멀쩡해 보인다. 당장 먹어도 될 것 같은 뻔뻔함이 있다. 사과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넣다가 타인에게 그런 류의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되는 모습을 바로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표정을 만드는 일은 ‘이거 썩은 거 맞나?’ 싶은 사과를 바라보는 심정과 다를 게 없다. 매번 감정의 흐름대로 정직하게 곪고, 드러나는 모습으로 살아도 뒤탈이 없다면 좋겠지만 가치를 잃은 사과의 얼굴을 할 때가 있다.      


냉장고가 하나의 세계관이라면 우리는 안에 무엇을 담고, 어떻게 재료를 사용하는 사람일까.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그걸로 어떤 맛과 향을 가진 음식을 만들지 고심한다. 싱싱한 재료를 고르기 위해 한참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고, 만져본다. 순간순간 어떤 선택을 한다. 늘 필요할 때마다 주어지지 않아도 상황과 마음이 동하는 한에서 결정해야 한다. 사람이 가진 저마다의 재료는 한 세계의 바탕이자 본질이다. 가끔은 자신의 재료가 마뜩잖게 보인다. 더 괜찮은 재료를 가진 사람을 만날까 봐 선뜻 내보이지 않기도 한다. ‘나’라는 재료를 놓고 고민하다가 방치하기도 하고, 변색된 걸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냉장고는 작정하고 다 드러내어 재료의 낱낱을 확인해 볼 수 있지만 세계관이라는 냉장고는 그걸 가진 사람만이 감지하는 온도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열리고 닫히는 속성처럼 만나는 사람, 물건, 사는 장소, 매일 보고 듣는 것 전부가 한 인간의 세계관에 보관되어 있다. 영구적이지는 않다. 언제든 변할 수 있고, 한 번 버리면 다시 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나’라는 재료조차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언제든 가변적이다. 그래서인지 점점 스스로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것을 취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요즘엔 돈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풍족한 삶을 사는 방법에 관심이 많다. 왜인지 몰라도 세련됨은 놓치고 싶지 않다. 국어 사전을 보니  ‘세련되다’가 동사적 의미로 '시련을 겪고 경험 따위를 쌓아 단련되다’라는 뜻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세련되고 마음을 풍족하게 만드는 삶을 저장하고 싶다. 나무의 이름을 기억하고 메모한다. 자연의 일부로 사는 사람으로서 꽃과 나무와 풀의 이름을 아는 기쁨이 있다는 걸 배운다.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가끔 미세먼지가 걷힌 날 구름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본다.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읽지 못한 책이 더 많지만 다시 읽어도 충분히 좋은 책이 있다. 기분을 내려고 책에 밑줄을 칠 연두색 펜을 샀다. 좋은 문장에 밑줄을 치면 잠시 그 문장을 내 삶으로 옮겨 와 필사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가격 대비가 아닌 오래 두고 싶은 물건을 사려고 한다. 손으로 만들어서 모양이 울퉁불퉁하지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도자기 컵을 샀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는 자신만의 일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글이나 인터뷰를 찾아 읽는다. 시계나 SNS를 무의식적으로 자주 보지 않는다. 화가 나면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차피 ‘나’라는 재료는 무엇을 갖다 대도 ‘나’밖에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오랜만에 냉장고가 텅 비었다. 버려도 너무 버려서 민망하지만 이젠 뭘 담아야 할지 제대로 고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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