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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y 21. 2018

카피라이터적인 삶



얼마 전 카피라이터가 쓴 책을 읽었다. 사실 이 책을 단번에 구입한 이유는 제목의 힘이 컸다. 「문장 수집 생활」이라니. 좋은 문장을 소유하고 싶어서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는 행위를 ‘수집’으로 표현한 게 와 닿았다. 매일 문장에 기대고, 멈추는 나로서는 구미가 당겼다. 부제는 ‘밑줄 긋는 카피라이터의 일상적 글쓰기’이다. 온라인 편집숍 29cm의 헤드 카피라이터인 저자는 소설 속 문장을 통해 카피를 쓴다고 한다. 읽기는 적재적소에 잘 쓰기 위한 재료인 셈이다. 소설의 사소한 대화나 묘사 시선을 허투루 보지 않고 마음에 드는 표현을 컴퓨터에 필사하고, 필요할 때 문장과 연관 지어 카피를 완성한다. 예를 들어 소설에서 아버지가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목젖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꿀꺽꿀꺽 마셨다’라고 묘사한 부분을 기억해 두었다가 큰 맥주잔을 돋보이게 하는 카피로 응용해 만드는 식이다. 일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회사 생활을 하면서 축적된 생활형 관점을 있는 그대로 카피에 녹여내기도 한다. 낯선 단어를 조합하고 리듬감 있는 표현을 쓰는 등 다양한 표현의 기저에는 독서 생활이 전제되어 있다.      

   

저자처럼 나 또한 쓰기 위한 대부분의 시간을 문장에 기대고 있다. 이건 책을 온전히 즐기면서 읽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생각지도 못한 표현이나 수심도 느껴지지 않는 웅숭깊은 문장에 밑줄을 그으면서 나는 왜 저렇게 쓰지 못하는지 한탄할 때가 있다. 근데 속이 없는 건지 감탄부터 하게 되고 긍정적인 자극을 더 많이 얻는다. 책 몇 권을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기 전 독서 일기를 쓰는데 접은 페이지를 모두 필사하고 감상까지 적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글을 쓸 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시간이 날 때마다 기록하려고 한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독서 노트를 펴서 닮고 싶은 문장을 다시 읽으면 머릿속이 환기되는 기분이다. 노력해도 예열되지 않는 감정에 온도가 생기고, 뭔가를 끄적이고 싶어 진다. 노트를 뒤져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으면 책장에서 그동안 읽은 책을 아무 데나 펼치거나 밑줄과 목차를 본다. 저자는 출퇴근 시간에 틈나는 대로 읽고 컴퓨터에 필사를 한다고 하는데 그 방법도 효율적인 것 같다.      


카피는 상품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상세 페이지를 열게 만든다. 우선 상품이 눈에 들어와도 문장이 함께 있다면 사정이 다르다. 물론 구매로 이어지도록 하는 게 카피라이터의 일이겠지만 잘 쓴 카피는 상품이라는 유형을 보다 참신하게 피력하는 힘이 있다. 29cm에는 메인 화면의 주력 상품 외에도 카테고리에 있는 것까지 대략 5만 개의 상품이 있다고 한다. 엄청난 양이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상품이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며 진열돼 있다.

 

최근 짜장면을 먹고 치우다가 포장을 뜯지 않은 나무젓가락에 ‘맛없으면 전화 주세요.’라고 쓰인 문장을 보고 웃음이 났다. 배달 앱을 통해 리뷰가 많은 곳에서 시켰는데 한 문장만으로 맛에 자부심이 있는 집이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배달음식이 흔해서 전단지나 애플리케이션으로 홍보가 어렵다는 한계 때문에 사장님이 나무젓가락 포장지에 들어갈 문장을 고심하여 카피했을 것이다. 업체가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떤가. 직설적이긴 해도 호기롭고 명료한 문장이었다. 게다가 맛도 있었다. 다시 짜장면이 생각나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이 집을 찾을 것이다.




카피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대부분의 소비는 ‘필요 needs’보다 ‘욕망 wants’에 의한 것이기에  카피라이터는 구매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한다. 나도 몰랐던 나의 마음을 건드려주는 게 바로 카피다. 우울하고 답답한 내가 나에게 꽃을 선물할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두 줄짜리 카피가 할 수 있는 위로다.   「문장 수집 생활」中



사람들도 카피라이터적인 삶을 산다.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을 어제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보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매일이 처음인 오늘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대할 것이다. 오전 7시에 수술이 잡힌 의사도 매일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해야 하는 환경 미화원도 빈 컴퓨터 화면을 애인처럼 붙들고 앉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카피를 만들 듯 하루하루를 낯설게 바라보고, 비틀고, 생략하고, 비유하고, 때로는 솔직하게 드러내는 삶. 나라는 사람은 어떤 카테고리 안에 숨어있는 주력 상품일지 생각해봤다.

   

세상 모든 물건이 사라진다 해도
에세이는 품절되지 않아요.
매주 월요일 오후
이곳 브런치에 디스플레이합니다.        


나는 카피라이터가 아니지만 매주 월요일에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는 걸 카피로 표현해 봤다. 아무리 괜찮은 상품이라도 잘 쓴 문장 몇 조각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듯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진열하는 삶을 산다. 진부하다면 한없이 진부할 수 있는 일상에 매일 욕망을 점화하고 스스로를 디스플레이한다. 진열 상품도 나이고, 인생의 카피라이터도 나다. '필요'보다 '욕망'이 구매를 불러일으킨다는 저자의 문장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필요가 아닌 욕망을 일으키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 필요에 의한 건 금방 가치가 없어지니 아무래도 욕망 쪽이 낫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삶은 좋다. 그러나 모두의 선택을 받을 순 없다. 복잡한 생각은 제쳐두고 우선 일상이든 글이든 카피라이터가 된 것처럼 표현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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