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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un 11. 2018

공허하고 확실한 위로

여름, 영화 '버닝', 「반딧불이」



손과 목덜미에 잔열이 느껴진다. 천천히 걷다 보면 문득 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살갗에 닿다 사라진다. 봄꽃을 다 피운 칠엽수, 이팝나무는 청명한 햇빛을 달게 받고 서 있다. 장미는 가고 땅에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한창이다. 요즘은 몇 시간 잔 것 같지 않은데 아침이 다가와 있고 창문을 열면 공기가 선들선들하다. 한낮에는 등에 살짝 땀이 배어도 그늘에 서 있으면 금방 식어버린다. 벌써 선글라스를 쓰고 양산까지 든 아주머니들이 보이는 걸 보니 여름이 올 것 같은 기운을 나만 느끼는 건 아닌가 보다. 계절도 전야제가 있다. 곧 낮이 사방을 한소끔 들고 일어서면 말간 저녁이 뜸 들은 대기를 천천히 식혀 줄 긴 여름밤이 찾아올 것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하루키의 단편 소설 「반딧불이」에서 읽은 한 문단에서 ‘여름이 오기 전에 이런 느낌이 있지!’싶은 부분을 발견했다. 나는 소설에서 계절을 표현한 부분을 즐겨 읽는데 운이 좋으면 이번처럼 스스로가 느낀 계절의 감각과 문장이 상치되는 기쁨을 얻는다. 예전에 가을을 표현한 한 두 문장을 보고 절판된 책을 찾아 헤맸는데 그 책도 하루키의 단편에서 알게 되었다. 계절을 직관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에두른 것도 아닌, 사소한 부분에서 감각이 확 일어나게 하는 걸 보면 역시 소설가답다.    




나와 그녀는 요쓰야 역에 내려서 선로를 따라 이치가야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5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도 낮이 되자 그치고, 낮에 내려앉아 있던 우울한 잿빛 구름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쫓기듯이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벚나무의 산뜻한 초록 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였다. 햇살에서는 벌써 싱그러운 초여름 냄새가 났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의나 스웨터를 벗어 어깨에 걸쳤다. 테니스코트에서는 젊은 남자가 반바지 차림으로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라켓의 금속 테두리가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소설 속의 두 사람은 아주 천천히 걷고 있을 것이다. 둘은 딱히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 걷고 있는 ‘나’의 시야에 보이는 사람들과 햇살의 냄새, 반바지 차림보다 라켓의 테두리가 반짝이는 것으로 여름이 스며든다. 두 사람은 함께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계절을 공유하고 있다. 동떨어진 시공간에서 소설을 읽는 나는 먼발치에서 남자의 시선을 관망하고 있는 기분이다. 어쩌면 물성이 아닌, 개념화할 수 없는 감각과 사유의 총합이 지금을 구성하는 전부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결여가 느낌을 극대화한다.


이 표현을 만난 이유는 영화 <버닝>을 보고 원작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읽기 위해 다른 작품도 실린 단편집인 「반딧불이」를 사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전체가 수수께끼라고 할 만큼 함의의 폭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극장에서는 팽팽한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기에 바빴고, 엔딩 크레디트를 멍하게 바라볼 쯤에는 이 영화에 어떠한 실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적으로는 대놓고 ‘욕망’을 드러냈다. 어릴 때 한 번쯤 해보고 싶던 불장난 욕구 같은 거다. 본능이 장난처럼 여겨지지 않을 때 점화된 욕망은 불어나고 그 결과 현실보다 더 그럴듯한 환상이 구축된다. 영화에서 종수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해미가 귤을 까먹는 마임 행위가 그랬다. 종수는 그 모습을 놀라워하며 방법을 묻는데 해미의 대답은 소설의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어머, 간단한 거예요. 재능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요, 거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뿐이에요.”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린다는 건 귤이 없다는 걸 의식한다는 반증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의지가 개입된다. 누구나 타오르길 갈망하는, 점화 직전의 성냥 하나를 가슴에 안고 산다. 새벽녘 짙게 깔린 안개 사이를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는 종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렇게 찾아 헤매는 것이 두려움을 쫓기 위한 건지 아니면 무엇이든 타버리길 바라는 욕구의 반영인지 영화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보여준다. 그냥 배고픈 사람을 리틀 헝거(little hunger)라고 하고,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을 그레이트 헝거(great hunger)라고 한다는 대사처럼 의식의 굶주림(결여)은 오히려 갈망하는 모든 것으로 대체된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모든 삶의 재료는 형태가 없어서 확실한 결과 치를 보장하지 않는다.


순서로 따지면 나는 영화를 본 후 원작 소설을 읽었고, 책에 실린 다른 단편을 읽었다. 영화를 보고 일부러 의미를 해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책을 읽고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났다. 그러다가 같은 책에 수록된 다른 단편을 읽었고, 부러 의식하지 않던 계절의 감각을 한 문단에서 빠짐없이 느꼈다. 형언할 수 없던 여름의 감각과 영화를 봤어도 희미했던 무언가가 어떠한 인과 관계없이 비슷한 맥락으로 선명해졌다. 실체로 드러나지 않아서 더 극적인 영역이 존재한다. 의식이 하나의 강물이라면 그곳에 숨 쉬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일을 강물이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할애한 시간이 다가올 어떤 시간의 질료가 될지 모르는 일이다. 피부에 닿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의식의 구멍, 내밀한 삶의 영역이 허무하면서도 단단한 위로가 된다. 그 방향이 두서없는 ‘바라보기’ 보다는 열린 결말에 기인한 ‘발견’에 가깝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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