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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un 18. 2018

정말 아름다운 건 당신

꿈의 대화



지구와 비슷한 또 다른 행성의 오후였다. 여름빛이 산발적으로 부서지는 어느 공원에서 아빠와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꿈을 꾸는 나는 죽은 행성에서 온 사람이다. 깨지 않는다면 함께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꿈속의 나는 당신의 옆모습을 보고 있다. 뼈마디가 느껴지던 등과 귀 옆으로 푹 꺼진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코끝이 덜 도드라질 정도로 살이 차 있다. 당신은 햇살을 맞을 때 마른 몸에 비해 두툼한 손을 이마 위에 걸치는 습관이 있다. 손 그늘 아래로 언뜻 보이는 속눈썹이 선명하다. 살짝 찡그린 미간 아래 보이는 갈색 눈동자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이다. 나는 클로즈업된 인물을 일인칭의 시점으로 관찰하고 있다. 반가움도 설렘도 존재하지 않는 무명의 장소는 지난 시간 어딘가를 이어 붙여 놓은 듯 익숙하다.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장소는 병원이다. 매일 병원에 갔다. 쉴 틈 없는 회전문을 비집고 병원 로비로 들어선다. 밝고 깨끗한 1층은 아직 산 자들이 어수선하게 모인 광장이다. 익숙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몇 초도 안돼서 채워진다. 주머니에 손을 찌른 무표정한 의사, 휠체어에 앉은 환자와 손잡이를 잡고 선 보호자, 병원 슈퍼에서 산 병 주스 세트를 든 사람, 엄마 품에 안긴 아기. 그들 사이에 며칠째 같은 점퍼를 입은 나도 들어선다. 정해진 층에 멈추다가 엄숙하게 닫히는 문을 참관하다 10층에 내린다. 활짝 열리지 않는 큰 창이 있는 휴게실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다. 반쯤 닫힌 반찬 통을 두고 마주 않은 환자와 보호자는 말이 없다. 별로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창문 바깥의 일은 연극에서 장면을 전환하는 배경 같다. 이따금 수액 걸이의 바퀴 소리와 자판기에서 음료가 덜컥 내려앉는 소리가 배경보다 더 극적인 사건으로 느껴진다. 잰걸음으로 복도를 누비는 의사와 간호사는 이곳의 주연이다. 병상의 수많은 조연과 엑스트라는 이름과 병명으로 표식 되다 잊히고 등장하길 반복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드라마. 4년 전, 나는 그곳에서 당신이라는 이야기를 놓쳤다.


꿈은 재해석된 드라마다. 나는 꿈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 붙이고 각색한다. 이야기의 연결성 때문일까. 아빠가 처음 등장한 장소는 병원이었다. 병색이 완연한 모습 그대로였다. 시간이 지나 어떤 날은 환자복을 벗었고 또 다른 날은 어린아이를 키우던, 납작한 서류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허리를 굽혀 건네던 젊은 가장이기도 했다. 아빠는 분명 당신이 소원하던 또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당신의 안녕이 꿈이 되어 나의 무의식에 닿았다. 그게 아니라면 나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당신을 불러냈을 것이다. 꿈속의 나는 언제나 무력한 시청자에 불과했다. 다행히 꿈은 그것을 꾸는 사람의 바람을 이해하는 듯 보였다. 꿈꾸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아빠는 건강해지고 젊어졌다.


꿈을 시청하기만 했던 나는 어느 날 처음으로 아빠와 같은 공원, 같은 벤치에 앉아있었다. 햇빛을 가린 당신의 손과 옆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한적한 공원 곳곳에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먼 파도의 일처럼 들렸다. 여름 햇살이 사방에 흩어져서 나무 아래, 잔디밭, 아이의 자전거, 우리가 앉은 벤치를 드리웠다. 나는 당신의 얼굴과 우리가 만든 그림자를 가만히 굽어봤다. 여름날의 말랑한 공기가 가볍게 흔드는 다리 사이에서 순하게 미끄러졌다. 공원이라는 장소에서 느낄 수 있는 일상적 소음, 함께 있음을 극명히 드러내 주던 그림자만으로도 완벽한 찰나였다.    


그때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다시 줄곧 응시하던 곳을 바라보며 “가자. 이 아름다운 날들을 잘 보내야지.”라고 했다. 우리가 만난 꿈에서 당신이 나를 향해 처음으로 건넨 말이었다. 나는 대답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 그러면서도 의식 어딘가에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소원했다. 그런 바람을 갖자마자 꿈에서 깨고 있다는 걸 직감하면서. 누추한 밤이 지나고 꿈에서 본 여름 햇살이 당도한 아침에 나는 당신의 말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빈 노트에 그 말을 적고, 입속말로 당신을 불러 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날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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