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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ul 16. 2018

합리화 놀이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유난히 리액션이 좋다는 걸 느낀다. 우리나라에서 ‘우와’, ‘오’ 하듯이 일본은 ‘에(え)’가 많다. 나는 그 리액션이 너무 재밌다. 처음에는 낮은 톤으로 시작하는 '에'가 뒤로 갈수록 소리의 꼬리가 길어지면서 의문형이 된다. 대단하다 (すごい)멋지다(すばらしい) 맛있다(うまい) 같은 표현도 맛깔나게 목소리의 톤을 한껏 들어 올리면서 이야기한다. 우리나라는 상대의 말에 크게 웃거나 박수를 치는 호응이 많다면 일본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는 듯 신기한 표정을 지으면서 짧고 굵게 반응하는 식이랄까. 조금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누군가 저렇게 반응해 준다면 말할 맛이 나겠다. 아무튼 리액션은 좋은 것. 나도 상대의 말에 반응을 잘 하는 편이다. 나로서는 잘 듣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기분을 드러내는 데 아끼지 않는 마음이 좋다. 그게 약간의 버릇이 돼서 크게 기뻐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더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기분을 아끼지 않으려다 보니 좋은 기분을 발견하고 마주하려는 의식이 자랐다. 어른들이 웃어야 복이 온다고 하듯 일부러 하다보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맥락이 점점 합리화 놀이로 발전됐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하루가 텁텁하다고 느껴질 때, 어제와 다른 길을 걸어서 집에 간다거나 환승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 분식집에서 어묵을 하나 먹고 뿌듯해 한다. 빵집에 갔는데 좋아하는 스콘이 딱 하나 남은 걸 보면, 나를 위해 남아 있었다고 착각한다. 퇴근길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등이 빨리 바뀌길 바라면서도 맞은편에 힘 없이 서 있는 사람이 보이면 '오늘 저 사람도 나처럼 힘들었구나' 생각하는 것. 그렇게 원래의 마음과 조금 다른 일을 하면서 오늘 하루를 괜찮다고 하는 거다. 매일의 기분에 스스로 감응한다.


며칠 전 친구와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왔다. 일어나자마자 30도를 웃도는 엄청난 더위 때문에 낮에는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 들어가야 했다. 하루는 생활 잡화를 파는 무인양품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는 물건을 파는 곳만 있다면 일본은 가게, 서점, 카페가 한 공간에 있다는 게 달랐다.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여름 한정이라는 망고 파르페를 먹고, 서점을 구경했다. 여행 중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차이와 평소라면 뭔가를 사기 위해서만 들르던 공간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마음이 가벼웠다. 물건을 살 때도 합리화 놀이가 적용된다. 소비의 영역에서 합리화는 꽤 위험한 일이지만 어차피 도를 넘을 일은 없기 때문에(역시 노력이 필요하다) 살 이유를 만든다. 특히 필요보다 욕망 때문에 사는 걸 잘 조절해야 되는데, 설령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유를 만드는 거다.   


버터 치킨 카레를 들고 망설이는 나를 보면서 친구는 “한국에도 있는 거라 나는 안 사려고” 라고 했다. 이미 내 손에는 카페에서 로스팅한 원두와, 사과 칩이 들려 있었다. 내가 여기서 사는 게 더 싸고, 한국보다 종류가 많아서 좋다고 했더니 친구는 웃으면서 “합리화 잘 한다”고 했다. 아! 나는 합리화를 잘 하는 사람이었지. 다시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사과 칩과 카레는 집에 온 지 하루도 안 돼서 사라졌지만 먹으면서 물건을 고르던 설렘과 공간의 분위기가 떠올라서 더 맛있었다. 어쩌면 물건을 산 게 아니라 여행의 순간을 돈으로 산 걸지도 모른다며 2차 합리화를 했다.       


어릴 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맛의 토마토주스를 마신 적이 있다. 그곳은 특별한 날 엄마와 돈가스를 먹고 나서 후식으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사러 들르는 커피숍이었다. 평소 같으면 커피숍 앞에 있는 아이스크림만 사서 지나가는데 웬일로 엄마가 커피숍에 나를 데리고 들어가더니 먹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다. 왜 토마토 주스를 시켰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꽤 비싼 가격이었다. 동그란 원목 의자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허공에 뜬 다리를 흔들고 있으니 유리잔에 빨간 토마토 주스가 담겨 나왔다. 내 눈높이와 얼추 비슷한 높이의 잔에 담긴 주스의 빛깔이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주스에 집중한 눈을 알고 엄마가 먼저 마셔 보라고 했다. 과육과 즙이 금방 분리되는 엄마표 토마토 주스보다 더 맛있을 거란 예상은 단 한 모금을 넘기기도 전에 끝났다. 단맛이 하나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하고 걸쭉한 토마토 주스였다. 순간 두 가지 생각이 싸웠다. 너무 맛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과 엄마가 모처럼 사준 주스인데 맛있게 마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보다 생각도 전에 찡그린 미간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왜? 맛없어?” 하더니 잔을 뺏어 마셨다. “맛이 없네. 근데 승연아, 건강에 좋은 맛이다”라는 말이 이어졌다.  왜 건강에 좋은 건 맛이 없을까. 그즈음 편식이 심해서 매일 억지로 마시던 보약이나 주스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사실 더 이상 한 모금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억지로 마시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더 마시면 좋겠다는 눈빛이었다. 달콤해 보이는 주스의 빨간빛은 가짜로 들통 났지만 엄마의 눈빛은 내가 아는 따뜻한 색이었다. 그때 왜인지 몰라도 주스를 보란 듯이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건 보약이야’

 

잠깐 비장한 표정을 짓고는 주스를 쭉 들이켰다. 주스가 줄어들수록 엄마는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행복해했다. 그 일화는 지금까지도 엄마가 기억하는 효도의 목록 안에 들어있다. 생각 해보니 그때 누군가가 나로 인해 기뻐하는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부모에 대한 마음 말고도 사랑의 합리화는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합리화의 얼굴은 테트리스 같다. 어떤 모양의 감정이 막무가내로 하강할 때 나는 언제 어디서든 방향이 있었다는 듯 맞춰 버리는 기분. 그러다 막무가내로 쌓여 버리면 게임은 종료되고 다시 모양을 찾아 맞추는 기분으로 지냈다. 최근 다시 펼친 책 「거리를 둔다」에서 ‘기쁨을 일부러 발견하려는 마음’이 적힌 구절을 보고는 오늘은 이 문장을 보기 위한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마음 하나만으로 하루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무사한 것만 같았다. 그럴 때 필요한 건 스스로에게 보내는 리액션.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민하게 상대의 말이 끝나자마자 ‘에(え)~~~~’라고 하듯이 마음대로 모양을 맞추는 합리화 놀이를 한다. 홀로 웃거나 탄식을 쏟아 낼 때 옆에서 반응이 시원찮으면 더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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