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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Jul 23. 2018

사소하게 행복하기



‘생활에는 불필요하지만 삶에는 필요한 것들’


아무 생각 없이 SNS를 보다가 어떤 카페의 유리창에 쓰인 글귀를 보고 한참을 멍해졌다.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를 마주하고 앉아 각자의 첫입을 맛보는 건 단지 먹는다는 행동에 비할 수 없는 행복이 있다. 차가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유리컵에 담긴 진한 아이스커피와 케이크 한 조각. 더 중요한 건 그걸 함께 나눌 사람이다. 커피와 공간을 생활이 아닌 삶으로 끌어와 생각한 마음이 담긴 문구여서 좋았다. 그런 소소한 힘으로 누군가의 하루는 풍족해질 테니 말이다.  


커피와 디저트의 시간을 정의한 문구를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삶에는 필요한 것들’이라는 구절에서 생각이 턱 걸려 버렸다. 곰곰이 떠올리는 멈춤의 행동은 있었지만 ‘이거다’라고 할 만한 뭔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사소해서 일부러 꺼내보지 않았던 터라 모양을 찾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구형이 된 아이폰 6는 저장 용량이 다 찼다는 알림을 전한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따로 업로드하지 않고 방치했더니 포화 상태가 되었다. 휴대폰을 바꾸면 용량이 늘어나서 굳이 사진 정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쉬운 생각을 하면서도 크게 바꿀 이유가 없어서 정리를 위해 사집첩에 들어갔다. 여행의 풍경, 거리와 하늘, 아직 마시기 직전인 커피 등 만 오천 장을 넘긴 사진들이 빼곡했다. 전체 사진첩이 있고 사진을 누르면 관련 항목으로 다른 사진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난 가을, 네 발 달린 동물(시댁에서 키우는 강아지인 또치 사진이 가득하다), 후쿠오카, 경기도, 인물 등으로 자유롭게 분류되어 있고 심지어 음악과 함께 편집된 영상처럼 볼 수도 있다. 결국 한 장도 지우지 못했다. 선택, 삭제로 쉽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기계가 보내는 알림으로 과거의 순간을 마주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만은 아니라고. 눈으로 쌓이는 앨범이 아니니 찍은 순간만 기억하지 말고, 자주 들여다보자고 다짐했다.


예전에 십 원짜리 동전이 주인공인 동화를 쓴 적이 있다. 소재를 생각하다가 길에 떨어진 십 원이 주인공이 됐다. 거스름돈으로 남은 주인공 십 원이 길거리에 버려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서랍이나 저금통에 갇힌 동전들을 알게 되면서 나중에는 십 원들이 연대해 하수구에 빠질 뻔한 또 다른 십 원을 구한다는 이야기였다. 주인공에게 이름도 붙여 주었는데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를 지으면서 행복했다. 그리고 십 원의 마음을 누군가 이해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화가 떠오른 건 최근 일본 여행에서 약속이나 한 듯 딱 맞아떨어진 1엔 덕택이었다. 일본의 1엔은 우리나라의 10원 꼴이다. 커피 원두를 사서 계산대에 갔더니 소비세까지 합쳐 뒷자리가 6엔이었다. 동전 주머니를 보니 마침 1엔이 6개였다. 계산대에 놓인 스테인리스 통에 여섯 개의 1엔을 신나게 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을 일본어로 소리냈다. 다른 구입 때문에 여행이 끝난 후에도 1엔이 몇 개 생겼지만 언제일지 모를 다음을 위해 남겨두었다. 예상외로 요긴하게 쓴 6엔처럼 또 다른 맞춤의 상황을 대비하는 기분이랄까.


1엔이나 10원짜리처럼 너무 사소해서 스쳐간 순간들이 있다. 1엔이든 10원이든 둘 다 더 큰 단위의 숫자를 위한 중요한 조직원인 셈이다. 한 장도 삭제하지 못한 휴대전화의 사진은 덩치를 불린 용량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장 한 장의 이야기에 있었다. 몇 해 전 이중섭 전시를 보면서 작품보다 그가 가족에게 남긴 편지가 더 인상적이었다. 가족을 생각하면서 편지를 쓴 마음이 한 사람의 인생을 구성해 왔고, 그 바탕이 작품을 만든 힘인 것 같았다.


얼마 전 엄마와 산책을 하다가 도로 가에 분홍 꽃이 달린 나무를 봤다. 무슨 나무일까 하면서 꽃이 참 예쁘다고, 어쩜 색이 이렇게 곱냐고 서로 경쟁하듯 칭찬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낭랑한 나무가 떠올라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았다. ‘여름 나무 분홍 꽃’으로 검색을 하니 이름이 배롱나무였다. 꽃말은 부귀. 곧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가 본 나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  


“배롱나무 꽃말이 부귀래. 배롱나무를 발견했으니 우리 돈방석에 앉을 날이 얼마 안 남았네.”   


수화기 너머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재미없는 농담도 잘 받아주는 아줌마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따라 웃었다. 사진첩이 터져 나가도 배롱나무 꽃 사진을 찍어둘걸 그랬다.  


카페의 유리창에 쓰인 문구에서 ‘삶에는 필요한 것들’ 이 ‘생활에는 불필요하지만’을 전제로 하는 거라 더 와 닿았다. 생활이라는 현실과 삶이라는 환상 중 좀 더 기대고 싶은 쪽이 있다면 삶이다. 좋은 사람과 커피를 마시는 시간, 실없는 소리를 하고서 서로의 웃음소리가 섞이는 순간처럼 삶이라는 환상은 이미 사소하게 행복한 일들로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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