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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Oct 08. 2018

덧없음의 위로

영화 <신과 함께- 인과 연>, <아이 캔 스피크>

지난겨울, 폭설 주의보가 연일 뉴스거리가 되던 퇴근길의 일이다. 집으로 가는 방향 쪽은 이미 통제가 되어서 나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가서 다시 한참을 돌아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 안에서 배고플 때 먹으려고 챙겨 온 바나나를 먹었고 터미널에 내렸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정류장은 한산했다. 편의점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먼저 보이고 그 앞에 낮은 채도로 불을 밝힌 정류장이 있었다. 이미 얼어붙은 길가에 부츠 굽이 닿을 때마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이 더 긴장했다. 그때, 조급하게 깜빡이는 신호등을 다 건너자마자 인도에서 큰대자로 넘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하늘을 정면으로 봤다. 그렇게 무방비로 넘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창피하다기보다 넘어질 때 내 무게만큼 힘이 실린 등이 욱신거려서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학생 무리와 모녀가 지나갔지만 다들 버스에 올라타느라 분주했다. 잠시 아득했다가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아서 서럽기도 하다가 웃음이 났다. 지금은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갑자기 모든 게 덧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책을 읽다가 그 단어를 마주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의 산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프로이트가 쓴 짧은 글인 <덧없음>을 인용한 부분에서였다. 요지는 시골길을 걷던 한 시인이 주변의 풍광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아름다움에도 끝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작가는 프로이트가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도 시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음에 놀라워하면서 덧없음에 대한 열린 질문으로 글을 맺는다. 나는 아직 덧없음을 논할 주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과 함께 공존하며 살고 있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덧없음>의 시인처럼 덧없음을 미리 걱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미리 걱정한 바람에 주변 풍광은 얼마나 더 애처롭게 아름다웠을까 싶다. 뭐든 흘러가고 소멸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세상에 예쁘고 소중하지 않은 게 없을 것이다.


그날 차가운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시 덧없음을 생각했다. 하루를 통틀어 처음으로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일을 하느라 바빴고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한 하루였다. 어떤 장소에 오래 머물렀지만 오로지 나로 존재하지 않은 시간을 보낸 기분이어서 그저 따뜻한 집에 가서 몸을 누이고 싶었다. 그때 정확히 왜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몸을 일으켜 한 시간 남짓을 달릴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할 텐데 말이다. 어떤 덧없음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보람이나 쓸모가 없어 헛되고 허전하다.’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추석 연휴에 연달아 <신과 함께-인과 연>과 <아이 캔 스피크>를 봤다. 나중에 두 영화에는 묘하게 시간이라는 맥락이 관통함을 느꼈다. <신과 함께- 인과 연>에서 저승 차사 강림은 살았을 때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 벌로 이승의 기억을 모두 기억하며 산다. 강림은 원귀의 재판을 맡는데 그 과정에서 원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승의 가해자에게 용서할 기회를 준다. 가해자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주인공 나옥분 할머니가 공무원 민재에게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서다. 실제 2007년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이 가결된 상황이 영화에 반영됐다. 나옥분 할머니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친구 정심을 대신해 연설을 한다. “i’m sorry. is that so hard?”라는 대사 한 마디가 저릿하게 남았다. 할머니의 어떤 시간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존재했을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  스틸컷


 <신과 함께–인과 연>처럼 용서를 구하지 못한 시간을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산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모든 건 죽기 전에, 언제 끝날지 모를 미지의 선 앞에 존재한다. 두 편의 영화는 내용도 색깔도 다르지만 이승의 시간이든 저승의 시간이든 결국 잘못한 것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역설을 전한다. 중요한 건 삶이 영화가 아니고서야 용서를 구할 시간은 현재라는 유한성 안에서만 효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는 건 다시 한번 사과하고 사랑하고 열심히 해 볼 기회를 얻었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덧없음의 또 다른 뜻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나가는 시간이 매우 빠르다’라고 한다. 머리로는 이해되는 것 같지만 왠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알지 못한다 해도 시간과 결속된 것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시간에 놓인 사람들은 덧없음이 그저 무상한 일이 되지 않도록 무늬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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