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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Nov 05. 2018

가을,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것들


매일 아침 가을은 더 바투 다가와 있다. 잘 마른빨래처럼 팽팽한 가을 하늘을 본 게 몇 번이었더라. 벌써 나의 시선은 하늘에서 나무로, 낙엽이 우르르 떨어진 발치로 향해 있다. 늦은 오후, 일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진 낙엽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끗하다. 비 내린 며칠이 지나니 벌써 차가운 공기가 감돈다. 계절이 가깝게 느껴진다는 건 곧 떠나보내야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요즘 엄마는 눈가에 주름이 너무 많아져서 고민이란다. 영상통화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이제는 인정을 해야 하나 봐”라고 웃는 모습에 나도 같이 주름지게 웃었다.


가을과 엄마의 주름이 가진 공통점. 세상에는 기다려주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사실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표현은 서투른 투정일 뿐이다. 그저 떨어지고 쌓이는 낙엽 길을 조금 천천히 걷고, 엄마의 잔주름을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흘러가는 시간에 나는 액자를 끼우고 기억날 만한 장면을 새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지난밤 촘촘했던 고민의 흔적은 다시 시작된 오늘을 비웃듯이 조금 비껴 가 있다.


신곡 <남>을 발표한 선우정아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그녀는 자신이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해서 말을 하는 편이라 평소에 가사를 쓸 때는 직설적이고 확실한 말로 전달하는 데 신경을 쓴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별을 다룬 <남>이라는 곡이 궁금해졌다.


눈물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여기까지야

이별이 이렇게 쉽네요

돌아서는 그 순간

사라지는 우리라는 말


처음에는 감성적인 가사에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멜로디의 이별 노래보다 덤덤한 첫인상이었다. 근데 들을수록 단정적인 말 안에서 메워지지 않는 울림이 느껴졌다. 어떤 이별의 말은 아무리 확실한 말이어도 소용이 없어서 언어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별에 관한 언어라는 게 말하는 방식의 차이로 크게 달라질 일은 없지만 말이다. 잊은 사람, 잊힌 사람, 잊게 될 사람. 나는 그 모든 사람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잘못은 희석되고 마음만 따끔거린다. 우리가 서로를 기다리지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자기 자신을 기다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감정적 반경 안에 있을 때 이별을 피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별은 사람들 사이를 너무 쉽게 놓아버린다.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 일에는 탓을 할 수 없다. 그저 각자 마음의 기울기가 달랐던 거라고 위무하는 수밖에.


이별이든 매일의 일상이든 그것을 일구어 나가는 사람의 책임감은 중요하다. 책임질 필요가 없을수록 더 신중한 자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사소한 일들에도 따르는 책임이 있고 유통기한이 있다고 의식하려 한다. 마음 속도와 달라 기한을 넘겼을 때는 유통 기한을 다시 매긴다. 그건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미룬 것과는 다른 맥락이다. 일 년 넘게 매주 글을 쓰면서 자의로 정한 마감이 책임감을 만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 새로운 글을 쓰고 나면 또 별 일 없던 일주일치의 부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 마음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면서도 확실한 건 써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기쁨이 더 크다. 앞으로 어떤 종류의 글이든 계속 쓸 수 있다면 그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 같다.  


며칠 전 편의점에 들러 요즘 유행한다는 아이돌 샌드위치를 사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연출한 것처럼 머리 위에서 낙엽비가 내렸다. 가까운 거리에서는 경비아저씨가 비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이터 쪽엔 한 무더기의 낙엽더미가 있었다. 지난 계절을 기억하는 무덤 같았다. 그곳엔 계절을 함께 한 이들의 내력도 함께 묻혀 있으리라 생각하다가 멈춰서 낙엽을 주웠다. 예전에는 예쁜 낙엽을 찾아 일부러 거리를 나서기도 했다. 좋아하는 계절을 기억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서가의 책 어딘가에는 언제 주웠을지 모를 낙엽 책갈피가 꽂혀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어떤 기억으로 살았을지 그리워졌다.


가을, 엄마의 주름, 이별, 낙엽, 글쓰기와 유통기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것들은 그렇게 오늘을 선물하고 가 버린다. 그래서 오늘을 더 오래 바라보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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