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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Nov 23. 2018

느려도 좋아   



어릴 때 나는 먹는 속도가 느려서 “밥알을 센다”는 핀잔을 자주 들었다. 그래서 늘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뿔뿔이 흩어져도 끝까지 남아 밥을 먹곤 했다. 가끔 집으로 놀러 온 친척 어른이 천천히 먹는 내게 너무 맛없게 먹는다고 할 때는 억울했다. 그냥 내 속도에 맞게 먹을 뿐이었다. 처음으로 먹는 속도에 불편함을 느낀 건 고등학교 때였다. 급식 시간에 친구들은 내가 밥 반 공기를 먹기도 전에 식판을 비웠다. 고맙게도 친구들은 나를 기다려 주었지만 왠지 같이 먹을 때보다 맛이 없어져서 음식을 남기기 일쑤였다. 사회에 나와서는 다른 사람과 어느 정도 먹는 속도를 맞추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빨리 먹으려는 시도도 해봤는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왜 빨리 먹어야 하지?’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즈음 사람마다 자신만의 리듬과 속도가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그 이후로는 곧 바뀔 것 같은 신호를 봐도 횡단보도로 뛰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처럼 오르는 사람들 틈에서도 마음이 급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몇 박자 더딘 마음이 내 속도에 맞았다.     

 

느린 게 좋을 때도 있다. 커피를 마실 땐 한없이 느슨하게 보내는 시간이고 싶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커피는 하루를 시작하는 중요한 의식이 되었다. 매일 핸드드립 커피로 하루를 시작한 지도 3년이 지났다. 처음엔 도구를 준비하고 내리는 과정이 길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에서 한 달에 두세 개 종류의 원두를 번갈아 마시는데 핸드드립 커피는 같은 원두라도 내릴 때마다 맛이 미묘하게 다른 게 매력이다. 예측 불가한 맛과 향은 물론이고 정성이 들어가니 맛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인 듯 아닌 듯 11월의 첫날에 새로운 원두를 개봉했다. 크리스마스 블렌드라 적힌 원두 봉투를 품에 안고 걸어가다가 바람이 겨울 공기처럼 닿았다. 집으로 돌아와 원두 봉투를 열자마자 테이블 위로 부드러운 향이 퍼졌다. 여느 때처럼 커피를 마시던 중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의 커피가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딱히 내가 만들어서가 아니라 천천히 마셔서 다 식어버린 커피도 충분히 맛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커피 맛은 온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던 바리스타 학원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필터에 여과되는 한 잔의 커피를 만드는 과정과 맛을 즐기는 속도가 느려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가 하면 열쇠는 느림의 미학을 가진 물건이다. 최근 자전거를 탈 일이 잦아지면서 묵직한 쇳덩이로 된 자물쇠를 구입했다. 포장된 상자 안에 열쇠가 들어 있었다. 열쇠를 만져본 게 오랜만이었다. 열쇠는 잘 맞춰 넣으면 반드시 열린다는 신속성이 있긴 하지만 작고 앙증맞은 탓에 꺼내는 시간을 요구한다. (가끔 한 번에 찾는 행운이 있기도 하다)


유년 시절, 주공 아파트에 살 적엔 매일같이 가방 속이나 주머니 속을 헤집어서 열쇠를 찾았다. 열쇠 하나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할 수도 있었다.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열쇠를 깜빡한 날엔 친구 집에 가 있거나 계단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당시엔 휴대전화도 없어서 계단 입구부터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기만 해도 벌떡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열쇠는 내게 느린 물건으로 남아있다. 자물쇠 구멍에 쏙 들어간 열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시원하고 좋았다. 훗날 전자동 시스템에 묻혀 열쇠가 옛날 물건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동이 지나고 잿빛 하늘이 짙어졌다. 선들선들한 기운이 사방을 메우고 있다. 매일 지나는 동네 모과나무를 보니 아직 서너 개의 모과가 매달려 있었다. 바싹 마른 잎사귀 때문인지 노르스름한 모과가 더 눈에 띄었다. 열 걸음만 걸어가면 바로 보이는 감나무에는 익을 대로 익은 감이 주렁주렁 늘어져 있었다. 모과나무와 감나무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덩그러니 계절을 맞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에 올해의 마지막 모과도, 감이 달린 나무도 볼 수 없을 것 같아 오래 눈에 담아두었다. 지금 가장 아름다운 색은 피어나는 색이 아니라 천천히 지는 색이다. 그런 변화를 바라보는 게 좋다. 더디게 저물어가는 계절에 느려도 충분히 좋을 것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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