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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r 25. 2019

비우기보다 돌보는 마음

 

  한 때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에 꽂혔다. 명징한 말이 주는 매력이 있어서 단번에 그렇게 하고 싶어 지는 때가 있다. 평소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나로서는 그 말이 구멍에만 맞춰 돌리면 바로 열릴 열쇠 같았다. 메신저의 대화명을 바꾸고 잊지 않으려고 일기장에 따로 적어두기도 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금방 드러났다. 선택은 마음가짐으로 할 수 있지만 집중은 행동이 따라붙어야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말이나 글은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책을 읽다가 문장에 밑줄을 긋는 일도 실은 그 문장처럼 사유하며 살고 싶은 마음을 확인하는 일이지 않을까. 그동안 참 많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책 귀퉁이를 접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들지 않을 때가 있다. 활자와 말들에 둘러싸여 읽기조차 싫어질까봐 두려웠는데 최근에 그런 순간이 왔다.


  생각을 하지 않아도 생각나고 아무것도 안 하기로 해놓고도 하게 되는 것들만 남기기로 했다. 되도록 읽지 않고 누군가의 말에 기대지 않기로 했다. 생각 다이어트에 돌입한 셈이다. 말과 정보가 범람하는 SNS부터 보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지만 대부분은 계속 새로운 사진과 일상을 나열하고 있었다. 책을 아예 안 읽기란 쉽지 않아서 정말 읽고 싶을 때만 읽었다. 인터뷰를 엮은 책을 읽다가 ‘청년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라는 인터뷰어의 물음에 답한 이성복 시인의 말이 눈에 띄었다.


 



멀리 보지 말고 자기 발밑을 보세요. 잘 안 되면 똑같이 어느 순간엔 시동을 꺼야 해요. 어느 날 내가 면도를 하다 면도기가 잘 안 들어 서비스센터에 전화했더니, 완전히 끄고 다시 켜래. 하지만 상황에 빠지면 끌 생각을 못하죠.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마음먹은 일을 누군가의 말로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상황에 빠져서 허우적대지 말고 그냥 시동을 끄자. 그래도 하고 싶은 걸 하자는 확신이 생겼다. 일하는 시간에는 오로지 일만 하고 피로가 풀릴 때까지 잠을 잤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고서는 약속도 잡지 않았다. 평소처럼 좋아하는 미술관에 가지 않았고 영화를 찾아보지 않았다. 글쓰기도 멈추었다. 그저 생활하는 나 외에는 모든 게 단출해지는 듯했다. 나름의 방식대로 시동을 끄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케아에서 화분을 샀다. ‘페퍼로미아’라는 식물인데 작고 귀여운 잎이 통통하게 나 있다. 식물명을 따서 ‘로아’라는 이름을 지었다. 화분에 붙은 스티커에 물은 적당히 주고 실내 밝은 곳에 두라고 적혀 있었다. ‘적당히’라는 말이 애매모호해서 자주 살피고 있다. 흙을 눌러서 말라 있으면 물을 준다. 실내 밝은 곳이라는 말은 어려워서 빛이 들어오는 때에 따라 옮겨 둔다. 줄기가 오르고 아기 손톱만 한 잎이 자라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뭔가를 살피는 마음은 그걸 돌보는 사람의 마음에도 물을 주는 것 같다. 들인 품만큼 무성해질 잎이 그려졌다.   


  사실 시동을 끄기로 한 기간 동안 글을 쓰지 않은 게 가장 후회된다. 잘 비우고 멈추면 쓸 것이 생겨날 거라는 건 오만한 착각이었다. 하루 8시간을 쓴다던 어느 소설가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쓸 게 없어도 엉덩이를 떼는 순간 쓸 일과는 멀어지는 거라고. 책상을 벗어난 시간만큼 두려웠다. 한창 자라는 식물을 돌보듯 계속 써야 한다고 마음이 쿡쿡 찌르고 있었다. 또 책에서 그 마음을 들켰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 공감해 줄 때는 행복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이 행복하진 않다. 그럼에도 쓰게 되는 의지, 욕망은 무얼까. 아마 위로다. 내 마음을 돌봐 줬다는 의지에서 발현되는 위안.

                                                              「태도의 말들」

                                                                                                                                           

    

  시동을 꺼 보니 알겠다. 비우는 것보다 돌보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책상에 앉아 빈 화면을 마주하고 어차피 다시 읽을 책을 펼친다. 생각지 않으려 해도 생각나고, 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게 되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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