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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Mar 11. 2019

청소와 일상


미루고 미뤘던 부엌 청소를 했다. 새해 들어 주변 정리를 하면서 일상을 재정비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마침 설 연휴에 일주일 가까이 혼자 집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약속도 잡지 않고 할 일도 미룬 채 이걸 해결하지 않으면 그다음 일도 없다는 마음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원래 한 번에 하는 걸 꺼리는데 어떤 날은 냉장고를, 어떤 날은 옷장을 몰아서 치워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3일이나 걸렸다. 청소하기 전. 우선 일하는 데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고 음악을 튼다. 팔을 걷어붙이고 다 치워버리겠다는 심산으로 시작한다. 시작의 호기로운 기운이 좋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는다.

  

찬장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꺼내서 기름기와 먼지가 들러붙은 부분을 닦아냈다. 잘 닦이지 않는 곳은 수세미에 베이킹파우더를 묻혀 1차로 닦고 또 세제를 썼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몇 번이나 곡소리를 내면서 거실로 피신했다. 이가 나간 컵과 그릇,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물건들을 확인하고 버릴 것을 추렸다. 오랜만에 찬장 밖으로 우르르 나온 살림들 때문에 깨금발로 다녀야 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조미료와 마시지 못한 티백들, 배달 음식을 시킬 때마다 받은 나무젓가락, 플라스틱 숟가락과 포크가 끝없이 나왔다. 청소를 시작 한 지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음악소리는 소음이 되었다. 음악을 끄고 진짜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는 정직한 노동이다. 정리를 하기 위해서 모든 물건을 꺼내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더러우면 닦아야 하고 깨끗해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두면 방치될 수 있다. 일상의 민낯은 내가 머무는 장소에 있고 자연스레 공간과 물건은 주인을 닮는다. 그래서 청소는 지금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취향이나 사소한 습관이 아무 데나 벗어둔 옷처럼 흩어져 있었다. 오래 돌보지 않은 흔적을 보니 그동안 참 무심했구나 싶어 씁쓸했다. 가끔 공간이 부족하다면서 새로운 집을 상상하기도 하지만 곧 생각을 고친다. 집의 크기가 어떻든 청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놓인 의식일 수밖에 없으니 매일 세수를 하고, 양치하듯 살뜰히 해 둘 일이라고 말이다.   


조금씩 치울 게 줄어들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들인 품만큼 제자리를 찾은 물건들은 윤기가 나고  생활하기 편한 위치에 놓인다. 되는 일보다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은 일상에서 청소가 정신적 해소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꾹꾹 눌러 묶은 쓰레기를 통에 을러메듯 던질 땐 속이 다 시원했다. 겉뿐만 아니라 찬장 안까지 깨끗하게 정리된 부엌을 보니 커피라도 한 잔 내리고 싶은 의지가 솟았다. 그런 면에서 청소는 정리 이상의 영역이 있는 것 같다. 없던 입맛을 되돌리는 음식을 만난 것처럼 관성에 젖은 일상의 의욕을 새롭게 불러일으킨다. 지금 내 위치 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일상을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청소가 아닐까. 치울 것이 눈앞에 쌓여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정리. 또 정리뿐이다.      


청소의 좋은 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정리가 끝난 부엌을 바라보자니 작정하고 청소만 하며 지낸 휴일이 아까워서 탄천을 걸었다. 입춘이 지났는데도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오후 다섯 시 즈음의 햇살을 등에 업고 길을 걸었다. 등은 따스했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도 맑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명절 전에 엄마와 대중탕에 갔다가 뽀송뽀송한 몸으로 나와 걷던 길도 그랬다. 매일 씻는 몸인데도 한 꺼풀 벗은 듯한 해방감이 있었다. 그때 마신 초코 우유는 얼마나 달던지.


유유자적하면서 걷는 길에 새소리가 들렸고 이름 모를 나무에는 벌써 봉오리가 달려 있었다. 자주 다니는 길이라 해도 계절의 변화를 발견하는 일은 생소하다. 언제든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익숙함을 확인하는 일상에는 평온함이 있다. 청소와 산책의 일이 그렇듯 지치지 않고 하루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이 대단한 데서 생겨나는 건 아니다. 집에 돌아오니 매일 보는 새로운 부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들반들해진 마음으로 뭐든 다시 잘해보고 싶다는 힘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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