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라이프를 하지만 난 미니멀리스트는 아니다.
아직 나의 집은 물건이 많이 쌓여있고 차마 손대지 못하는 공간들도 많다. 남편과 조율하지 못해 비우지 못하고 있는 스노보드와 남편의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어마어마한 해바라기 액자 등 아직도 해결해야 될 것들이 넘쳐난다.
얼마 전 소파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여보 스노보드 이젠 안 타는데 아니 사실 못 타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정리할까?"
스노보드가 있는 앞 베란다 오른쪽은 창고처럼 사용되고 있다. 난 이사 오면서 그곳을 창고가 아닌 물건 보관장소로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여행가방과 이것저것 정말 테트리스처럼 쌓여있는 죽은 공간이 된 것이다. 물론 미니멀 라이프를 하면서 어느 한 공간은 물건을 비우기 전 대기하는 공간으로 쓰여야 하지만 그곳이 창고가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내 집에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먼지 쌓인 공간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
부피도 크고 기다란 저 스노보드만 없다면 정리하는 게 좀 수월 할 것 같은데 20대 초반에 사서 30대까지 열심히 스키장 다니며 사용하던 스노보드를 남편은 버리지를 못한다. 어째서 이렇게 애착이 가는 물건이 되었을까 의아하기도 한데 또 각자의 애정 물건은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이 있으니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실용적인 걸로 따진다면 이젠 본인 나이 40대 중반이고, 보드를 안 탄 지 10년이 되었고, 앞으로 보드를 타러 다닐 확률이 희박하며 10년이나 된 보드를 관리를 하지 않았으니 상태도 엉망일 텐데
왜 비우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두어 번 비우기를 의논해 보았는데 여전히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왠지 김 빠지는 기분에 나의 미니멀 라이프에 제동이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몇 개월을 쉼 없이 달려왔으니 잠깐은 쉬어도 된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것일까?
평소에 물건을 오래 쓰고, 물건을 쉽게 사는 남편이 아니라 어쩌면 진짜 미니멀리스트는 남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 스노보드로 좀 서운한 감정이 생겼다.
난 집에 진짜 물건 하나 없이 텅텅 빈 곳으로 만들 자신은 없다. 또 가족의 수가 5명이라 물건이 줄어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차분하게 정리된 집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3주 전 남편에게 일장 연설을 할 계기가 생겼다
1층에 사는 덕에 비가 오면 습도가 말도 못 하네 올라간다. 집안을 걸어 다닐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날 정도로 습했다. 내 몸은 습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이라 비 오거나 흐린 날은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미니멀 라이프도 좋지만 일단 첫 번째는 건강이 우선이라 생각한다. 몸이 아프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기며 그 무엇도 나에겐 필요가 없어지는 일을 한번 격은 터라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다.
남편에게 제습기 구매를 의논하다 우연히 친정집에 10년도 넘은 제습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바로 가져왔다. 이제부터가 고민의 시작이다. 제습기가 필요한 날엔 꺼내어 사용하면 되지만, 그다음엔? 어디에다 보관하느냐는 문제이다. 제습기를 다 쓰고 정리하며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자.. 이걸 어디에다 둬야 하지?"
나의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놓치지 않을세라
"여보 거봐 우리 집에 물건이 들어왔을 때 어디에 둘지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공간의 여유가 없다는 거잖아"
난 허허벌판의 집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대신 정돈이 잘 되어 있으면 분명 비상용 공간이 나온다고 그래서 창고 같은 앞 베란다를 정리해서 버리고 선반을 두어 딱 선반에 들어갈 만큼의 물건만 소유하자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몇 개월 전 5단 책장을 버리려고 할 때, 옆에서 엄청 아까워하며 어디 쓸 곳이 없냐고 두리번거리는데
차마 막무가내로 버리자고 하지 못했던 내가
그럼 베란다에 두고 수납으로 한번 써보자 그랬는데 결과는 엉망진창 수납이 되었다.
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정사각형 작은 수납은 눈에 안 보이게 처박아 놓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정리정돈이 아니라 정리하지 못하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뿐이었다. 아픈 손가락 같은 5단 책장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스노보드로 기분이 상한 터라 이것저것 손대는 게 귀찮아지고 하고 싶지 않아 졌다.
남편에게 서운한 감정으로 미니멀 라이프가 흔들리면 안 되는데 이 감정을 계속 가져간다며 앞으로 미니멀 라이프가 불퉁 명해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난 잠시 쉬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만 먹을 뿐 내 눈에 보이는 물건에 대한 답답함은 느껴진다.하지만
큰 물건에 대한 비움을 조금 늦춰보자는 것뿐이고 소소한 물건들의 정리는 계속해보자 생각했다.
내가 걱정하는 저 공간도 머지않은 시간에 정리정돈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내가 처음부터 느린 안단테 같은 미니멀 라이프를 하려고 한 이유도 그중에 하나였다.
성격이 급하고 한번 생각한 건 그 자리에서 끝내야 하는 나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불같이 확 타올랐다. 금세 꺼져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으로 계속 '천천히 해보자, 서두르지 말자'라고 셀프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
나 혼자만의 공간들도 아니고 나만 쓰는 물건들이 아니기에 가족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하고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는 5인 가구의 미니멀 라이프라서 어쩌면 많은 시간을 돌아서 가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갈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축구는 연장전에 들어가면 선수들이 기진맥진이지만
나의 미니멀 라이프는 연장전에 장기전이라 하더라도 지치지 않게 하고 싶다.
그래서 미니멀 라이프를 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일상 그 자체가 미니멀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