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째 도시락 싸는 아내

하트가 잘못했네

by 다정한온기

라면 끓이면 다 불어 터지게 만들고

계란 프라이하면 온전한 완성을 맛본 적 없고

늘 엄마가 해주던 음식만 식탁 앞에서 받아먹던

흔하디 흔한 도시 여자의 12년째 도시락 싸주기


군인이랑 결혼하는 것에 대해 전~~ 혀 아무런 감이 없었다. 그냥 결혼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결혼 생활이라 생각했다. 아! 단 한 가지 군복 입은 남편이 너무 멋있었고, 군부대라는 베일에 가려진 곳에 갈 수 있다는 설렘 정도? 딱 그 정도의 기대감이 있었을 뿐

그 이면의 삶에 대해서는 결혼을 앞둔 기대에 부푼 여자가 생각할 의무는 없었다.


모든 결혼의 과정이 끝나고 난 뒤,

내게 덜컥 찾아온 첫 번째 난이도 ★ ★ ★ ★ 별 4개 의 도시락 싸기

도시락이라곤 고등학교 때까지 엄마가 혹은 할머니가 싸준 게 다인데 내 기억 속 도시락엔

조금 들어있는 반찬 두 가지와 1인용김? 아니면 참치캔 1개 그것뿐인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몰라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그냥 있는 반찬 싸주면 된단다 아니 있는 반찬? 반찬이 어디 있는데?

그 반찬 내가 만들어야 되는 건데 난 아직 밥물도 모르고 반찬 만들 줄도 모르는데 어떻게 있는 반찬을 싸 달란 거지? 김치는 친정엄마가 주신 거고 , 김치만 싸갈 순 없잖아 정말 그 당시 온갖 생각에 어떤 반찬을 어디에 담아서 줘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도 글로라도 배운 솜씨? 솜씨랄 것도 없이 적힌 대로 만든 반찬과 친정엄마가 준 반찬을 챙겨 넣고 아침 일찍 밥을 지어서 보낸 나의 첫 도시락


하루 종일 도시락에 대한 품평회가 궁금했다. 남편 혼자 먹는 게 아니라 선후배들이 비행시간에 따라 나눠져서 먹기 때문에 나의 도시락 때문에 남편이 부끄러워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었고 한편으론 어디서 출몰한 자신감인지 칭찬을 듣고 싶기도 했다.

퇴근하고 온 남편과 신혼이니 하루 종일 떨어져 있는 시간을 애틋하게 생각하며

꼭 붙어 앉아서 나의 야심 찬 질문을 시작했다

"오빠 오늘 도시락 어땠어? 누구랑 먹었어? 이 상사님이랑? 아님 후배들이랑? "

나의 속사포 같은 질문에 비해 남편의 대답은 현저히 느림을 느꼈다. 그날의 남편 표정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남편은 입을 열었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여럿이 같이 먹었는데 근데 도시락에 왜 하트가 없냐고 물어보던데?"


엄마야~~ 어쩜!! 좋아 하얀 밥 위에 초록색 완두콩으로 흐트러짐 없이 만든 하트 모양을 빼먹은 것이다

아니 사실 생각 못했었다. 온 정신이 반찬 만들기에 가 있었던 터라 완두콩 하트까지 생각을 못했다.

근데 남편의 목소리에는 내심 하트를 기대했다 실망한듯한 느낌도 섞여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해졌다.


군 복무 25년이 넘은 남편은 비행 스케줄에 따라 점심을 먹는 시간이 달라져서 부대안 식당에서 점심시간 맞춰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야간비행이라도 있거나 야근을 하게 되면 저녁 도시락까지 두 개를 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결혼을 일찍 하신 분들이 많아서 대부분 음식에는 베테랑 분들이시고. 상투 튼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남편은 막내였고 우리 결혼식 이후에 후배가 결혼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으니깐 고로 나도 음식으로는

와이프들 사이에서 명함 내밀었다가는 큰일 났었다..

간혹 선배가 닭볶음탕을 냄비째 가지고 왔다거나, 갈비찜을 해오거나 , 비빔밥을 먹을 수 있게 형수님이 재료를 다 준비해서 싸주거나 하는 나는 상상도 못 할 음식들이 점심 도시락으로 등장할 때가 있다.

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난 음식 대부분을 친정에 의지를 많이 했다 대신, 엄마의 음식이 도시락으로 가게 되는 날엔 맛있게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가 들려오기는 했었다.


2년 정도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도시락 휴식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 남편

내가 몸이 안좋을땐 반찬만 해놓으면 혼자 알아서 싸가기도 하고 어느날은 내가 배달해주기도 하곤 했다.

최근 몇개월은 부대 식당밥을 사먹었는데 다시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겠다면서 나의 의중을 물어보는 남편

뭐 이젠 도시락 따위 무섭지 않게 된 주부 9단인 나는 단번에 OK 사인을 시원하게 날려 줬다.

부대 식당 밥이 지겨워질 만도 할 것이 코로나로 외식도 못하고 죽어도 식당밥만 먹어야 하니 물릴 만도 하다

주말부부를 하고 있는 선배들은 주말에도 집에 가지 못하니 집밥 먹을 기회가 박탈당하고, 그리워지기도 하니 반찬을 서로 싸오면 밥은 쏘시겠다는 선배와 함께 도시락을 싸기로 했단다


요즘 도시락을 싸면서 나 스스로 놀라운 게 있다면

매일매일이 무슨 반찬을 싸야 할지 있는 재료 가지고도 고민을 하던 모습에서

냉장고 한번 쓰윽 스캔하고 음 이거!이거!이거! 접수했어! 끝

그리고 한치의 망설임 없이도 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갈 수 있게 준비해 두는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12년 전 선배들의 와이프 음식을 먹었던 남편이

12년 후엔 자신의 아내가 만든 음식을 선후배들과 함께 먹고 있다.


늙은 오이를 반찬으로 싸간 날 퇴근하고 온 남편이

"늙은 오이무침 같이 먹는 사람들이 옛날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 같다고 역시 형수님이라고 그랬어, 그리고 주물럭은 이 맛이지 그러면서 너무 잘 먹었어"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닌가


물론 목소리에는 뿌듯함의 힘이 살짝 들어가 있는 듯했다.

도시락 12년 경력 끝에 내가 이런 말을 듣기도 하는구나

시간이 흐름이 느껴졌다.


완전한 요린이에서 탈출하는 데는 남편 도시락 싸주기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잘하던 못하던 난 도시락을 싸야 하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그 시간들이 나를 주부 9단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고로 무엇이든 몸으로 부딪혀야 한다는 결론






더운 여름, 불 앞에서 힘들지만 나의 도시락 반찬 만들기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된다.

그리고 남편이 전역하는 날까지 계속 도시락을 사야겠지?

오늘도 수고할 남편을 위한 한 끼를 정성껏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