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만 환절기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아과는 늘 대기자로 가득 차 있고 최대한 그 시간을 피하고 싶어 아침 일찍 서둘러 준비하고 소아과로 출발했다.
다행히 진료순서는 짧았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병원에서 마련해둔 대형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어린이 프로에 홀딱 빠져서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그때까지는 내 아이에게 주어진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전혀 알지 못했다
" 어머니 이게 정확하지는 않은데 어.. 이게 여기 여기 보이시죠? 동그랗게 쌀알같이 하얗게 보이시죠? 이게 모양이나 위치가 진주종이랑 굉장히 흡사하거든요 아이들한테 잘 생기는 건데 혹시 모르니깐 진주에 있는 이비인후과 가서 정확히 보실 필요가 있으실 것 같아요 너무 걱정은 하지 않으셔두 되고요 "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도통 의사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진주종은 뭐구,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단을 받으라는 말은 또 뭐지'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머릿속을 뒤로한 채 진료실을 나와서 받은 처방전을 가지고 1층 약국으로 내려갔다. 약이 지어지는 동안 아이는 가장 좋아하는 비타민 장난감 코너 앞을 서성거리며 맑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내게 보내고 있었고. 나는 '진주종'을 초록창에 검색어로 입력하고 수많은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진주종 고막 안쪽에 생기는 진주 모양의 종양. 형성 과정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관의 기능이 좋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관은 외부의 공기를 귀 안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알레르기나 축농증 등으로 기능이 떨어지면 고막 안의 공기가 계속 흡수되어 고막의 약한 부위를 안으로 끌어당기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몇 년 계속되면 결국에는 이 질환으로 발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종 [cholesteatoma, 眞珠腫] (두산백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사전적 의미와 설명을 보고 난 뒤에 내 몸에 불안감이 휘몰아치지 시작했다.
종양이라고?
막내딸은 중이염을 일찍 시작했다. 위로 언니가 둘이나 있어 바이러스에 노출되기가 쉬웠고 아이를 하나 키울 때처럼 모든 면에서 세심하게 돌봐줄 수가 없었다. 난 막내 말고도 돌보아야 할 아이가 둘이나 더 있었고 살림도 해야 했고 나 자신도 돌보아야 했기에 내 몸은 한 개이지만 내 정신과 마음은 분열된 채 생활했다. 그래서 어떤 한 가지 일에 온 정신을 다 쏟으며 집중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출산 후 일상들이었다.
세상 모든 감정이 다 나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책감, 불안감, 실망감, 부끄러움, 스트레스, 판단이 흐려지기 전에 내 정신을 꽉 붙잡고 순서를 정해야 했다.
남편은 한대뿐인 차를 가지고 일주일 출장으로 집에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비인후과에 가서 아이의 진주종이 확실한지 알아야 했는데 내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이사온지 얼마 안 되었고 믿을 곳이라고는 성당 자매님들의 단체톡뿐이었다. 이곳에 오래 사셨던 분들에게 상황설명을 하고 진주에 이비인후과 잘 보는 곳을 추천해달라고 글을 올리자. 근처 사는 자매님 두 분이서 시간이 되신다며 병원에 같이 가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 순간 신은 내게 천사두분을 보내주신 것 같이 기뻤고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수술전 아이는 늘 그렇듯 즐거운 아이
이비인후과에 도착해서 진료를 받은 아이는 진단이 내려졌다.
진주종
사이즈가 크지는 않지만 빠른 시일 내에 수술을 해줘야 하며 사이즈가 커지면 내시경이 아닌 귀 뒤 절개 수술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청각에 장애가 올 수도 있다며 진료의뢰서를 써주시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속으로 아니길 아니길 그렇게 빌었지만 결과는 내 희망사항이랑은 달랐고 다시 집으로 가는 자매님의 차 뒷좌석에서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내리는 걸 느꼈다. 아이는 진료받느라 소리 지르며 울어서 피곤했던지
자매님들이 사준 젤리를 양손에 꼭 움켜쥔 채 내 품에서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들어 있었다.
정신을 차렸다. 현실적인 판단이 필요했고 병원을 찾아야 했다. 여기저기 물어봐도 주변에서는 '진주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주종 수술을 제일 많이 한 의사는 분당 차병원이었다. 우리 집에서 400km쯤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다른 나라를 가야 되는 것처럼 너무 멀리 떨어진 도시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부산 동아대병원 사천에서 2시간 정도 가야 되는 동아대병원에도 진주종을 잘 봐주시는 교수님이 있다고 했고 수술 후기도 좋았다고 한다. 남편은 분당차병원을 생각했고, 나는 부산 동아대를 생각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아이가 셋이나 있는 엄마이다. 그리고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했다. 단순히 수술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흔한 3차 병원의 진료가 언제 단 한 번에 끝나는 경우가 있었을까? 몇 번의 진료와 몇 번의 병원 방문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때마다 4시간 넘는 거리를 아이와 다녀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남아있는 두 아이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었다. 우린 상의 끝에 부산 동아대 병원으로 결정했고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우린 수술 전 3번의 진료와 수술 전 검사를 받았고 수술 날짜로 정해진 2019년 5월 28일 병원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가는 동안 아이의 이마가 불덩이처럼 열이 올랐고 기어코 38도를 넘어갔다.
병원 도착 후 진료를 보았지만 역시 열이 나는 아이는 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 열이 나는 상태에서의 마취는 위험하다고 수술 날짜를 2주 뒤로 미뤘고 우린 또 2주간의 긴장감을 안은채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어김없이 우리 가족에게 흘렀고 주위 사람들의 기도와 격려와 걱정을 뒤로한 채 병원으로 출발했다.
아이는 열도 나지 않았고 순조롭게 입원 수속을 밞고 난 뒤 환자복을 입은 아이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왔다.
막내딸은 환자복도 이쁘다며 좋아했고 생전 처음 누워보는 병원 침대에서 콩콩 뛰어보며 마치 여행지 숙소에 온 듯 상기된 얼굴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남편은 집에 있는 두 아이들을 돌보러 출발했고, 나와 막내딸만 남겨진 병실에서 나는 걱정으로 아이는 설렘으로 첫 입원 생활을 시작했다. 밤새 아이와 좁은 병원 침대에서 꼭 붙어 자느라 온몸이 뻐근했지만, 이렇게 붙어 자는 것이 신생아 때 이후 얼마만인지 애써 기억해야 했다. 커가면서 엄마보다는 언니들과 같이 자고 싶어 했고 아이는 조금씩 나의 곁에서 멀어지는 연습을 했었는데 병원에 있는 만큼은 태어나 얼마 안 된 막내의 잠자리를 내내 지키는 4년 전 같았다.
아침 일찍부터 수술실 들어가는 준비를 해야 했다. 다행히 수술이 미뤄지지 않았고, 제일 먼저 수술시간이 잡혀서 금식하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배고픔을 덜 느끼게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온갖 좋은 말로 왜 밥을 못 먹는지 왜 물을 못 마시는지 이야기해주고
"귀가 아야 하니깐 우리 아야 한 거 멀리 도망가게 한 다음에 엄마가 긴 젤리 사줄게 라온이 잘할 수 있지?"
긴젤 리를 사준다는 말에 아이는 앙다문 다부진 입에서 "네"라는 대답이 호기롭게 나왔다.
수술전날 아이는 그저 놀이터 같았던 병원
수술실로 내려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리는데 아이에겐
"우리 병원 자전거 타고 구경 가볼까" 라며 수술실 가는 길을 놀이처럼 이야기했다.
수술실 앞에서 아이에게 노래도 불러주고 이것저것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리기 위해 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막 떠들었고 나중에 정신 차리고 난 뒤에는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수술실의 커다랗고 하얀 문에서 수술실 간호사가 나왔고 나에게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했다.
수술실은 겨울왕국처럼 무엇이든 얼음으로 만들 것 같은 차가운 공기가 내 피부를 짓눌렀다. 벽은 온통 초록색이었고 우리 말고도 수술을 받을 몇 사람이 침대에 누워 있었고 다 어른이었다.
난 휠체어에 링거 바늘을 꼽고 있는 이 작디작은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 너무 그 순간이 힘들었다. 초록색 벽을 보며 "우리 여기에 나무를 그리면 진짜 이쁘겠다 라온이 두 초록색 좋아하지?"
"그럼 초록색이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이는 아직 모든 걸 눈치 채지 못하고 연신 초록색인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며
나무, 풀, 자동차, 장난감 등 아는 것들을 있는 대로 말로 내뱉고 있었다.
수술실 들어가기 전 아이와 사진 찍으며
마취과 의사와 레지던트들 그리고 간호사까지 내 기억으로 4명 정도가 내게 다가왔고
마취를 시작할 거라고 그랬다 난 어리둥절해서 "여기서 마취를 하나요?"
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온이에게 다가가며 "아이를 잠시 안아주세요"라는 수술실만큼 차가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 말투가 기분이 안 좋았다는 느낌을 받을 정신도 겨를도 없이 난 아이를 안았고
바로 옆 커다란 스테인리스 테이블에 아이를 내려놓을 수 있게 몸짓으로 이야기하는 의사의 요구대로
아이를 내 품에서 떼어놓으며 그곳에 아이를 앉혔다
"괜찮아 라온이 아픈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 옆에 있던 다른 의사는 주사를 건네받았고
그대로 아이의 링거에 주사를 놓았다
정말 이 모든 게 5분도채 걸리지 않았고, 의사들은 내게 아이에게 어떠한 당부의 말을 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았다. 라온이는 모르는 선생님들에게 둘러 싸여 겁먹었고 나를 쳐다보며 간절하게 내게 팔을 뻗으며 안아달라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몇 방울이 채 떨어지기 전 그 투명한 주사액은 아이의 링거 호스를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아이는 1분 아니 30초도 안 되는 시간에
앉아 있는 그 상태 입 벌 리며 울고 있는 그 표정 그리고 눈물이 눈에 맺힌 그대로 시간이 멈췄다.
그대로 마취가 된 거였다. 아이는 꼭 메두사의 눈과 마주친 것처럼 그 자세 그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무 놀란 나는 "이게 마취가 된 건가요?"라는 질문에 의사의 대답은 "네 보호자는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라는 퇴장의 메시지를 받았다.
아이의 초점이 그대로 멈춰버린 눈은 꼭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수술 침대에 눕혀지는 걸 보지도 못하고 수술실 밖으로 나와야 했다. 수술실 밖에서 난 오열하기 시작했다. 막내의 마취된 모습은 너무 충격이었고, 꼭 그렇게 멈춰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병실에 올라가 있으면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연락을 준다는데 난 수술실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냥 계속 수술실 문만 바라보여 울기만 했다.
남편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어 아이가 수술실에 들어갔고 마취를 어떻게 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남편의 대답에 내 귀를 의심했다"뭐 그런 걸로 울고 그래.."
더욱 설움이 쏟아져 나왔다. 남편이 아이의 마취 장면을 보았어도 내게 위로라고 건넨 이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님 아이를 병원에 입원 시 킬즈음 나와 사이가 안 좋아서 내가 우는 게 그냥 싫었던 것일까 지금 글을 쓰는 내게 남편의 말투가 귓가에 맴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 병실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빨리 수술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의 우는 모습에 같은 병실 보호자가 괜찮을 거라며 음료수 한 개를 건네어 주었다.
두 시간 정도가 흘렀다. 길어지는 수술시간에 점점 더 초조해졌고 병동 간호사에게 물어보아도 친절하지만 딱히 정확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고 잘될 거라고 위로를 해주기만 했다. 그러나 아이를 수술실에 들여보낸 엄마에겐 그 이야기가 위로가 되지 않는 다는걸 그 간호사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벨이 울렸고 아이가 회복실에 있다며 내려오라는 말에 세상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고 드디어 수술이 끝난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침대에 올라가셔서 아이를 안아주세요 눈에는 해가 되지 않는 약을 발라둔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아이가 마취에서 깰 수 있게 말 걸어주세요 " 간호사의 당부에
난 온통 약으로 발라진 아이의 눈과, 수술 후 붕대가 감긴 왼쪽 귀를 보며 또 눈물이 터졌고
울먹거리며 아이의 귀에다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 보았다
"라온아 너무 잘했어 고생했어 이제 괜찮데 엄마야 엄마 왔어 눈떠서 엄마 봐줄래?"
아이는 마취에서 깨어나느라 끙끙 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힘겹게 눈꺼풀을 올려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난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라온아 엄마야 엄마 왔어.. 엄마가 미안해 많이 아팠지? 이제 괜찮아 엄마가 있으니깐"
내 눈물이 아이의 볼을 타고 흘렀고 막내는 점점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마취 때문에 힘들었던 건지 수술한 곳이 아파서였는지 아이는 서럽게 울기 시작하고 눈물도 흐르기 시작했다
그쯤 남자간호사와 수술 담당 간호사가 와서
"이제 병실로 올라갈게요 옷 벗어주시고 올라가면 병동에서 안내해 드릴 거예요 "라는 말을 끝으로
난 침대 위에서 아이를 안은채 남자간호사의 도움으로 병실까지 올라갔다
이동하는 중 간호사가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많이 울어~ 많이 울어야 마취가 빨리 풀려 실컷 울어야 마취 금방 풀리니 보호자분 애가 금방 마취 풀리겠어요"
수술후 얼굴이 퉁퉁 부어 나온 아이는 내 심장이 반으로 갈라놓는 아픔이었다
그 말처럼 아이는 병실에서 계속 울었고 나는 우는 아이에게 실컷 더 울기를 바랐던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실컷 울고 난 아이는 내 품에 계속 안겨 이었고 울음이 잦아드나 싶더니 마취가 풀린 듯 잊어버리지도 않은
'긴 젤리'를 사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의 엄마가 마음 졸인 걸 알았을까 막내는 나에게 웃음을 선물해 주었다
마취 풀린 아닌 금식임에도 너무 잘 참아주었고 나는 배고픔을 덜 생각할 수 있게 최대한 대화를 하고 애니메이션도 보여주고 병원 자동차라고 하는 휠체어에 태어 복도를 돌아다니고 1층에 가서 사람들 구경도 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었다. 아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름처럼 "즐거운 아이"여서 일까?
오전에 수술실에 들어갔다 온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웃고 참새처럼 말도 많았다.
그렇게 수술과 입원을 마치고 아이의 수술 경과는 좋았고 좁쌀보다 작은 "진주종" 은 터지거나 잘리지 않고 잘 제거되었다고 했다. 재발률이 높은 진주종은 이렇게 깨끗이 제거되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신의 축복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화살표 부분이 진주종이 제거된 귓속
정기검진으로 1년 반을 부산을 다니며 진료를 받았다, 보통 재발이 1년 반에서 2년 정도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 정도 기간 동안 정기검진을 다닌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 수술한 지 2년이 되는 6월이 되었다. 아이의 수술은 6월 5일 매년 6월이면 아이의 수술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세 아이의 육아로 힘든 타이밍이면 아이들의 아팠던 기억을 떠올리면 말썽 부리고 가끔 미워도 지금처럼 크게 아프지 않고 내 곁에서 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유독 태어날 때부터 엄마를 많이 울렸던 막내는 태어나 하루 만에 자가호흡을 하지 못해 산소마스크를 쓰고 나를 울렸고, 진주종 수술 이후 내가 켜놓은 스팁 다리미를 호기심에 얼굴에 갖다 대는 바람에 화상을 입어 나를 울렸다. 엄마의 조심성 없는 탓인 것 같아 나는 죄인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때마다 아이는 잘 버텨주었고 잘 자라주었다
"라온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고 장난스레 물으면 "엄마도 좋고 아빠도 좋아요" 라며 눈치껏 서운하지 않게 대답하는 아이는 언니들과도 맞짱을 뜨며 무서울 것 없는 6살 건강한 아이로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