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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온기 May 10. 2021

나의 그날들,

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지난 3년간 나만 느끼는 고통 속에 살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위로는 해준다 그냥 하는 말이다. 돌아서고 나면 나의 이야기를 곱씹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걸 알고 그것에 대해 서운해하거나 알아달라고 하지 않는다.

막내를 낳고 18개월 되던 해에 생전 처음 들어본 지방 소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19살부터 살았던 경기도에서 20년 만에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 집은 결혼 후 4번째 이사한 집 201동 301호

그 소도시를 떠나 지방광역시로 온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그곳을 생각하면 건강하고, 큰 걱정 없고, 삶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낙원이 아닐까 싶다. 그 도시를  중심으로 지리산 자락의 산청, 하동, 남해바다가 품고 있는 삼천포, 통영, 고성. 남해섬 주변에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그 중심에 있으니깐 말이다. 나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건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에서의 3년은 즐겼던 시간보다 아프고, 상처 받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훨씬 많았음은 사실이다.





이곳에서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어디를 가면 난 늘 앉아만 있는 엄마일 수밖에 없던 날들







4번째 관사로 이사 4개월째

난 신생아인 듯 낮에 6~7시간을 잠을 잤다. 가족이 놀러 가는 차에서도 잠만 자고,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잠들고, 아침엔 등교하는 아이들 챙겨주지 못할 정도로 일어나지 못했다. 2학년이던 큰딸이 혼자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고 "엄마 머리 묶어줘.."라고 내게 다가오면 , 진심 몇 톤 트럭 같은 내 몸은 일어날 의지가 없었다.

'왜 이런 거지? 나 정상이 아닌데'

겨우 큰아이가 등교하고 나면 관사 안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둘째와 셋째의 등원은 6살 둘째가 3살 동생을 양치하라고 다그치고, 세수하라고 다그치고 케어해주면서 시작되었다.


남편은 늘 새벽 출근이었다.

내가 아픈 줄도 모르고 행여 내가 아프다 해도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여유가 없어 아마도 미안한 마음에 모른 척했던 것 같다. 새벽 6시가 좀 넘은 시간이면 혼자 밥을 대충 국에 말아먹고 출근하고, 밤 11시면  군복에서  쇠 냄새를 풍기며 퇴근했던 남편

그 3년의 시간 동안 남편과도 잦은 다툼과, 대화 단절되었던 시간들, 울며 악다구니 써가며 싸웠던 시간들

아마 우리 결혼 생활중 서로에게 가장 상처를 많이 준 시간이었을 것 같다.

정시출근 , 정시퇴근은 남편에게 없는 삶이다.

남편의 특기는 전투기 정비특기, 비행 스케줄에 따라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정해지기 때문에

때론 새벽 3시에 출근할 때가 있어 그 시간에 일어나 남편을 출근시켜준 적도 많았다. 모든 군인들이 다 그런 삶은 아니지만, 2010년 첫째를 품고 있고 출산이 몇 개월 남지 않은 여름, 엄청난 태풍이 서해안 도시를 덮쳤을 때, 30여 년이 된 관사의 베란다 창은 미친 듯이 흔들렸고, 난 그 미친 듯이 흔들리는 창문을 남편도 없이 혼자 무서움에 배가 뭉치고 당기는 와중에서 붙들고 이었다. (그 태풍으로 관사 안에 장정 3명이 손잡고 둘러야 하는 나무가 뿌리가 뽑혔었다 그만큼 우리 집 창문도 무사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시간 남편은 내 옆이 아닌 태풍에 비상대기로 부대에 들어가 있었. 흔한 일이다. 그 시간에 관사에는 남편이 집에 있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깐.


가끔 생각한다. 정말로 전쟁이란 게 실제로 일어난다면, 날 지켜줄 사람은 없을 거고, 난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그래서 살아남아야겠다고..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이내 진지해지는 내 모습이 진심이란 걸 안다.



한 달의 시간낭비

그 내과의사 지금도 생각하면 가서 멱살 잡고 싶다. 동네 내과에 가서 증상을 이야기하고 진료를 보는데

갑상선 초음파를 보자고 했다. 전혀 모르는 질환은 아니었다. 엄마가 갑상선 질환이었고, 외할머니가 갑상선 질환이었던 걸 알았기 때문에 내 증상을 엄마에게 말했을 때 엄마는 갑상선 문제가 아닐까 하며 귀띔해주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았다. 초음파를 보고 난 뒤 내 목에 있는 갑상선 사진을 봤을 땐 온통 시커먼 색이었다.

물론 실제로 내 몸이 그런 색은 아니었지만.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 흑색은 진짜 거부감 느껴지는 사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드라마에서처럼?

의사는 내 갑상선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1cm 이상되는 점들을 가르치며 10개가 넘는다고,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될 것 같다고 했다. 눈앞이 깜깜 해지는 드라마틱한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한 달 전 엄마가 갑상선에 암이 있어 첫 번째 수술을 받은 터라 온몸의 세포가 긴장되는 느낌을 받긴 했다.

'나도? 나도 그런 건가?'

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 첫 번째 생각은. 아이들뿐이었다. 눈물이 났었다.

이제 겨우 이사 와서 전학한 뒤 적응하고 있는 2학년 첫째 딸과, 어린이집 옮긴 6살 둘째 딸과, 이사 와서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다니고, 기저귀도 안 뗀 20개월 셋째 딸, 아직 세 아이들은 주 양육자인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되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거 없지만, 내가 엄마의 자리를 비워야 할 시간들이 많아지면 그 빈자리를 남편이 오롯이 다 해낼 수 있을까? 내가 수술하게 되면 내 간호도, 아이들도 남편이 할 수 있을까?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하지? 명의를 찾아야 하나?

그곳에서 3차 병원을 그것도 좀 인지도 있는 곳으로 가려면 부산으로 가야 했다. 근처에 대학병원도 있지만. 난 그곳은 가고 싶지 않았기에 혼자 어느 병원으로 갈지 고민했다. 남편에게 이야기할 시간이 며칠 동안은 없었다. 해뜨기 전에 출근하고, 해 지고 나면 오는 남편을 기다려 이야기하기엔 내 몸은 이미 지하세계까지 떨어지고 있었고, 그 와중에 아이들 등교 하교, 등원 하원. 씻기고 밥 먹이고, 정리까지 만으로도 이미 내 체력을 넘어섰고, 울며 하루를 마무리했던 시간들이었기에 남편을 기다릴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메시지를 통해서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병원 다녀온 뒤 일주일 후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것도 아주 덤덤하게 말이다 내 안에 선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남편에게 나의 소용돌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일하는 것만으로 힘든 사람에게 내가 짐이다 라며 징징거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남편도 담담하게 들었다. 어느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을지,  수도권으로 올라갈지 아님 부산으로 갈지

서로 답을 주지는 못했다 사실 큰 기대치도 없었다. 나와는 성향이 판이하게 달라서 어떤 일에 대한 판단이 좀 다르고 그 과정 역시 좀 다른 사람이라 늘 그랬듯이 속 시원한 대답은 없을 거라 예상했다.


단단해지기로 한다

내가 만약 혼자의 삶이었다면, 아니 결혼을 했어도 내게 아이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니 불과 몇 년 전엔 나도 혼자였고 내가 기댈 곳은 부모님밖에 없던 사람이었으니 그때를 생각해보면 된다.

사실 나약했다. 성장해온 환경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지만, 타인이 생각하는 나는 무지 당차고 시원시원한 성격이라 생각하는 말들이 많았는데, 그건 전형적인 속임수였었다 나를 포장하는 방법의 하나였고 그게 포장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포장이 아닌 내 모습이라 나도 착각하고 살았을 정도였으니깐 말이다

나는 그 잘 포장된 모습 뒤에 소심하고, 의지력 없고, 모래성 같은 멘털을 가지고 상처 받으면 관계를 끊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차게 사고 치고 엄마의 뒤에서 치맛자락을 잡고 숨어있는 못난 딸이었다.

그런 내가 딸을 셋이나 낳고, 엄마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뒤로는 다시 나를 다른 모습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단단한 사람, 누구에게 기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다 해야 되는 강인한 사람으로 말이다

근데 그 포장이 이젠 나의 내면에 스며들어서 일체형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아프지 않고 살 수는 없다. 꼭 아플 것이다. 걷지 못할 수 도 있다. 말할 수도 보지 못할 수도 아님 그 모든 것들을 못할 만큼 신체 불능이 올 수 도 있다 라고 생각하니

아이들을 사랑으로만은 키우기엔 나도 아이들도 너무 나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춤형 병원을 찾게 되기까지

한 달의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내 몸은 물먹은 솜이 되었고, 여전히 아침에 아이들 케어가 힘들었고

나를 보는 사람들 마다

'왜 이렇게 부었어요?

'얼굴빛이 안 좋아요 '

등등 수많은 본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걱정이라는 단어 아래 내뱉어 주었고, 그중에 가장 듣기 싫었던

'사람이 등치 값을 못하고 아프고 그래?'
'다들 '그렇게 한 번씩 아프더라'
 '맨날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다녀'
외모 판단에 징글징글하게 지친 내가 가장 혐오하는 말은
외모와 겉모습으로 인사치레 하는 것인데

늘 그럴 듯 그 누구도 내 예상 스코어 평균을 올려주듯 딱딱 겉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키 170cm의 체구가 큰 사람은 아픔을 피해 가는가?
안녕하세요 대신 왜 이렇게 부었어요? 가 인사가 될 말인가?


그렇게 나는 사람들의 말에 나를 보호하기 위해 멀리서 아는 얼굴이 보면 아닌 척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가곤 했다 그 당시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고 최선이었다

병원을 찾기 위해 난 전국 맘 카페를 거의 가입하다시피 했다 이러다 해외 맘 카페도 가입할 모양새였는데

4월 5월 두 달 동안 갑자기 몸무게가 8kg 이 늘었다. 하염없이 잠을 잔다. 기운이 없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짜증이 많이 생긴다. 모든 일에 의욕이 없다. 아침마다 나는 1kg 정도의 붓기를 가지고 일어난다, 불면증이 생긴다,..... 이 모든 증상이 한꺼번에 몰려온 상황에 그 의사가 한 혹이 10개가 넘는다는 말이 겹쳐 미친 듯이 찾고 검색하고 읽고 , 도움되는 글 폰 바탕화면에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갑상선 전문병원

갑상선 내과

갑상선암

갑상선암 치료법

갑상선암 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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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에 좋은 음식

갑상선에 좋은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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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 수술

수도 없이 많은 검색어를 입력하고

어느 지역 병원으로 갈지도 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찾고 또 찾고  그러다 지역 인근 카페에서 갑상선 병원 추천으로 가장 많이 보이는 안**내과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고, 왜인지 모르지만 그냥 그곳을 가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그곳을 왜 가야 했는지 알 것 같다. 살고 싶어서 , 그저 아프기 전으로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서 시체 같은 지금 내 상태를 벗어나고 싶었으니깐 그 본능이 나를 살려주려 한 것이라 생각한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 눈물 펑펑

병원을 찾아간 나는 생각보다 작은 동네 내과에 불과한 병원을 보고 살짝 놀랐고, 그 작은 내과에 꽉 들어앉아 있는 환자들에 두 번째 놀랐고, 동네 내과라 생각한 병원에 임상병리를 포함 간호사가 5명이란 사실에 세 번째로 놀랐다. 기다리는 시간만 40여분 정도 환자 이름을 간호사가 아닌 전광판에 나오는 "000 환자 들어오세요" 차임벨 소리도 아니고, 의사가 직접 차트를 보고 환자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것에 네 번째 놀랐다.

내 이름을 부르고 들어간 진료실은 양쪽문이 다 트여 있고, 딱 책상 하나와 책장뿐이 없는 소박한 진료실

" 엄청 힘들어 보이네요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요?" 라며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첫 대화를 시작한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난 말문이 트일 새도 없이 흐느껴서 울었다.   동시에 39살 나는 창피하지만 내가 아프다고 어떻게 해달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울면서도 할 이야기를 다 하는 거 보니 내가 어른이긴 한가보다.

그동안의 아팠던 일정을 선생님께 속사포로 브리핑하고 나서 좀 울음이 진정되고 나니. 선생님께서 나의 브리핑을 되짚어 다시 내게 이야기했고, 바로 갑상선 초음파를  해보자 하셨고 초음파를 한 뒤 설명해주는 선생님의 말에 또 한 번 눈물보가 터졌다.

한 달 전 사는 동네 내과의 의사의 말에 의한 혹 10개 이상은 혹이 아니었고, 까맣게 보이는 건 갑상선에 염증이 생겨서 까맣게 되어있는 거라고

"염증이 심하네요?"

"힘들었겠어요!"  

"그리고 혹은 없고, 염증을 혹이라 오인할 정도로 염증이 심한 상태네요"
마지막 말에 안도와 함께 또 울어버렸다.
혹이 아니면, 암도 아니고, 내가 아이들을 두고 멀리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한 달 동안의 고민과 힘든 시간이 억울하기도 하고, 그 오진을 내린 의사의 얼굴이 크로스가 되면서

당장 가서 나의 한 달을 보상하라고 소리 지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아요~ 좋아질 수 있어요~ 약 잘 먹고 우리 다음 달에 함 봅시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진료를 마치고 온갖 피검사를 한 뒤로 선제적 약 처방과 함께 나는 의사 선생님께 눈물을 보였고 , 선생님은 내게 안도와 위로와 희망과 처방전을 주셨다. 그 뒤로 햇수로 3년째 멀리이사온 지금도 그 작은 동네 내과를 원정 다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를 살려준 병원이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난 처방받은 신지로이드를 먹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먹는 일이 그냥 일상이 된 것이다.

아침마다 뚜껑여는 나의 약통 이 약통을 다 쓰고 나면 아이들 고체 치약 가지고 다니는 용도로 사용한다

지난달 처방을 받기 위해 내원했을 땐 이사 후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또 한 번 위로가 되었다.

"여기 이사 와서도 잘 견뎌 냈잖아요~ 할 수 있어요 적응할 수 있어요~ 관사에서 짱 먹고, ~~~~~"

웃으며 진료실에서 나오긴 했는데

왜 짱 먹으라고 하는지는 좀 의아했다. 옛날의 관사를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지금은 예전과 다른 걸 모르시는 것 같다. 종 치면 눈 치우러 다 나와야 되는 그런 시절의 관사가 아니에요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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