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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온기 May 15. 2021

어머님, 졸업만 할 수있게 해주세요

선생님의 부탁

내가 25년 뒤 이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을까?

선생님과 나만 알고 있었던 일




고등학교 입학식


문득, 정신 차리고 나니 가고 싶은 고등학교가 생겼다. 그 당시 살던 도시에 생긴 지 3년쯤 된 특수 목적 고등학교인데 같은 계열의 학교 중에서는 인지도가 낮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곳은 갈 실력이 되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졸업앨범과 더불어 그 당시 학교마다 교지를 발행했었고, 그 교지에는 전교 학생회장, 전교 부회장과 함께 문예부장인 내 기고문과 얼굴이 인쇄되었다. 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16살 여드름이 잔뜩 난 여학생이었다.

두발자유, 다른 학교와 다른 교복 스타일, 그리고 가장 원하던 글을 쓰는 걸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입학식은 내가 처음으로  결정했고, 그 결과를 위해 열심히 했던 시간들의 보상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아이들과 같은 번호와 학년만 달라질 뿐 계속 1반만 할 수 있는 좀 색다른 학교

1학년 1반 32번

2학년 1반 32번

3학년 1반 32번

그게 내가 3년 동안 써야 할 반과 번호였다

첫 담임선생님을 만나는 날.

앞문으로 들어오시는 선생님은 작은 키에 다부진 인상에 훗날 눈썹만 송승헌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진한 눈썹을 가지고 계셨다. 선생님은 교탁에 교사 일지와 출석부를 내려놓으시고 칠판을 향해 뒤돌아 서시더니

1번 000 2번 000 3번 000 4번...... 그 뒤로 끝번까지 한 번도 출석부를 보시지 않고 우리 반 아이들의 번호와 이름을 전부 외워서 부르셨다. 지금 생각하면 정성이고 노력이고 담임으로서의 열정이 넘쳐나시는 건데

그 당시 기억나는 아이들의 반응은 '뭐지.. 저 선생님...@@'

선생님은 첫 담임이었고 첫 제자들이었고 첫 번째 열정이었다. 남편에게도 선생님의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이 이야기는 두어 번 해서 그런지 남편도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다




건네주신 만 원짜리


정규수업이 끝나고  청소시간 갑작스러운 복통이 시작되면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다른 친구는 교무실로 가고, 우리 반의 유일한 남학생 ((세상 그런 조합이 있을까 싶지만 남녀공학에 남녀합반 근데 우리 반에는 단 1명의 남학생 그리고 나머지 41명의 여학생으로 이루어진 반이었다 ))

이어서 아마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자신과 거의 같은 급의 나를 둘러업고 주차장으로 갔다. 다들 맹장염을 생각했지만, 그 당시 얼마나 아팠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창피했냐가 중요한 일이다.

진료 보고 나서  의사 선생님의 진단은 배출되지 않은 가스와, 변비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창피하고, 부끄럽고 , 한참 예민한 여고생이 변비 때문에 온 복통을 남자 선생님과 함께 병원을 오게 되는 건... 거기다 관장까지 했으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 내 머릿속의 기억들, 생전 처음 관장이란 걸 했고, 복통은 언제 있었냐는 듯 선생님과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길 선생님의 차는 갓길에 세워졌다 뒤에 앉아 있는 내게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셨다.  '어 왜 돈을 주시지?' 잠시 당황했고 선생님께서는 이내 손짓으로 갓길 옆에 있는 속옷가게를 가르치며 " 가서 사  오니라"

관장을 했던 터라 옷을 버렸을까 봐 사 오라며 건네 주신 거였다. 꼭 엄마 같았다.

그때 엄마는 내 옆에 없었다. 난 엄마의 지인 집에서 혼자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IMF 외환위기는 우리 집도 휩쓸고 갔었다

오빠는 군 입대했었고, 부모님은 잠시 사람들을 피해 지방으로 가셨고, 나는 그렇게 혼자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했고, 그 상황을 알고 계신 선생님께서 내가 얘기할 곳이 없을 거라는 걸 아셨던 것 같다. 그땐 그냥 " 감사합니다" 한마디 한 것이 다였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혼자 버티고 있을 제자를 걱정해주는 선생님의 방식이었구나 생각이 든다.






졸업만 하면 안 됩니까?

 난 고3, 4월에 결국 전학을 결정했다. 이젠 그 도시에서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친인척들도 나를 돌봐주지 못했고, 아빠도 연락두절이었고, 엄마는 나를 외가 친척들이 있는 도시로 전학을 시킨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딸아이를 전학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 너무 가고 싶어 했던 학교를 졸업 못하게 된 나, 근데 어리지만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떼쓰고, 반항하고, 억지 부릴 수 없었다. 수능 모의고사가 있던 4월 22일 난 전학 첫날 아무 준비도 못한 채 수능 모의고사를 치렀고  눈물 흘리며 본시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험을 쳤던 그날 하교하는 길에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펑펑 울면서 집으로 걸어갔다. 그게 나의 고3, 19살 전학한 날의 아프고 아팠던 기억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성인이 되고 20대 초에 엄마와  옛날 얘기하다가 고등학교 선생님 얘기를 해주셨다


"너희 선생님이 너 전학 안 시키면 안 되냐고 그렇게 말씀하셨어  어머님 졸업만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1년도 채 남지 않은 졸업이니깐 좀 버티시면 안 되냐면서 졸업하게 해주고 싶다고 그러셨었지 근데 어쩌니, 너랑 나랑 집 얻어서 있는다 쳐도 혹시 네 아빠가  집을 모르니 술 먹고 너 다니는 학교 찾아가서 난리라도 칠까 봐 걱정돼서 어떻게 살 수가 있겠어. 선생님한테는 아빠 얘기는 하지는 않았지만, 아휴 생각만 해도 징글징글하다 엄마도 너 졸업시키고 싶지 안 그러고 싶었겠어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학굔데, 선생님이 너  방이라도 얻어주면  학교 다니고 하면서 챙겨보겠다 했는데  네 아빠만 아니면 그래도 좀만 버티고 너 졸업시켜주면 되는데 너 거기 졸업했으면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후회해야 무슨 소용이지만, 내가 만약 그때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고집을 피워서라도 그곳에서 졸업하려고 했을 것이다. 정말 내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근데 이미 다 지난 시간들인걸 되돌릴 수는 없고

다만 그때 보호자 없이 혼자 있던  내가 누구에게 눈물 한번 보인적 없지만

늘 선생님께서 신경 써주시고 계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특별히  잘해드린 것도,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티 나게 그런 건 없지만

그때 알지 못했던 것들

그때 몰랐던 마음, 선생님의 첫 제자들 중 한 명이라도 끝까지 함께 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학 이후 선생님께서 편지도 써주셨고 반 친구들 사진도 보내주셨었다. 그때 받은 편지 가끔 물건 정리하다 보면 그 시절 기억하며 씁쓸한 마음이 든다. 비록  그 학교의 졸업장도 졸업앨범도 없지만, 내겐 가장 좋은 선생님 한분은 계신다.  스승의 날 얘기만 나오면 난 항상 선생님 생각을 하면서

'많이 늙으셨을 텐데... 잘 지내실까'









에필로그:)


24살쯤 전국을 돌려 배낭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 코스가 7번 국도를 따라가는 거였고

그 라인의 아래쪽에서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그 사이  결혼도 하셨고 아이 둘 키우는 아빠가 되신 선생님

시외버스 터미널로 데리러 오신 선생님과 전학 이후 처음으로 뵙게 되었는데 여전하셨다. 흔쾌히 선생님 댁에서 하룻밤 재워 주신다 하셨고 선생님의 아내분 역시 같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이셨다.

고등학교 입학 후 라디오 '김현철의 디스크쇼"에서 선생님 사랑해요라는 코너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나우누리로 사연을 보내서 선생님과 함께 전국방송을 탄 적이 있었다. 그때 선물로 받으신 오디오를 결혼할 때 혼수품으로 가지고 왔다며 " 이기 니랑 라디오 나갔다 받은 거 아이가 ~ 아직도 고장 안 나고 잘 있는 거 봐라~" 라며 추억에 빠졌던 날이었다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내게 봉투를 손에 쥐어 주셨다

안에는 3만 원이 들어있었다. 관장한 18살 제자에게 갓길에서 속옷을 사 오라며 주셨던 만원이

배낭여행하는 24살 제자에게 3만 원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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