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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끝없는대화 Jun 25. 2021

퇴사 일기 #2

시간에 따른 심경의 변화

퇴사 예정을 밝히고 지금까지 3주의 시간이 흘렀다.


첫 4일간은 해방감과 의욕에 젖어 에너지 넘치는 시간을 보냈다. 퇴사를 알린 당일 오후에는 퇴사 후 가장 빠른 제주도 항공권을 끊었다. 회사의 노예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업을 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창업 정보들을 알아보고, 주식과 재테크 공부도 얄음얄음 해보고, 창업아이템 구상도 해보고, 자기 관리를 하겠다고 매일 퇴근 후 요가도 했다. 나는 남은 한 달 안에 사업을 구체화시키고, 모아둔 자본금을 까먹기 전에 결판을 보려고 했다.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고, 자유를 맞이할 날을 손에 꼽으며 행복에 젖었다. 곧 지나가리라 생각하니 그렇게 싫던 출근길도 나쁘지 않았다. 행복하게 아침 햇살을 맞기도 했다.


 5일째 되는 날,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창업을 하겠다고 알아보았으나 막상 사업 아이템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하는 짓이 마치 "수능 7등급이 법대를 가겠다고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 선생님이 되겠다고 수학의 정석을 난생처음 펼쳐보는 것, 장기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수술대에 서는 것, 가사도 못 외운 가수가 무대에 선 것"같이 느껴졌다. 두루뭉술하게 마인드맵으로 그려지는 정도의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었고, 정확히 하고 싶은 것도, 구체화시킬 방법도 몰랐다. 내가 사업병에 걸려 회사를 때려치운 철없는 패배자로 보였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좋았고, 손재주에는 자신이 있었다. 내 손끝의 감각과 컨트롤을 믿었고, 여가시간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무언가를 만들었다. 공예의 종류를 불문하고 금방 배웠고, 대량 생산된 공산품이 아닌 손길이 깃든 수공예 작품들이 좋았다. 지금까지 배웠던 수공예로는 프랑스 자수, 미싱, 니들펠트, 가죽공예, 오리가미, 도예, 전통매듭, 마크라메, 목공... 등이 있다. 끈기가 없어서 대성한 취미는 없다. 취미를 만드는 것이 취미 인지도 모른다.


 손재주만 믿고 공예로 창업을 해보겠다고 했지만 막막해서 친구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스트레스받는다고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니 그냥 한 달은 푹 쉬라고 조언해주었다. 아직 어리니 일 년은 푹 쉬어도 괜찮다고. 뭐가 무섭냐고. 4년제 대학 졸업해서 회사 잘 다녔고, 아직 되돌리지 못할 실수는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하던 것들을 손에서 억지로 내려놓았다. 모든 계획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이고 푹 재웠다. 너무 좋았다. 돈이나 미래에 대한 것은 쳐다도 보지 않았지만, 쉬는 시간을 맘 편하게 즐기는 편은 아니라서 곧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운동도 하고, 친구도 만났다. 많은 것들을 할 에너지가 내면에서 솟아난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정신이 명료하고, 초점이 맞아간다. 기도를 하는 것처럼 간절하고 단호한 의지가 나를 감싼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잘할 수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뭘 이루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 인생에 목적을 굳이 찾자면, 잘 지내는 것뿐이니까.


 물론 근자감이다. 그러나 똑같이 근거가 없으면 자신감이 없는 것보다 있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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