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그늘

밤그늘 : 밤의 그늘. 곧, 밤의 기운이나 자취. (출처:네이버어학사전)

by 이다래

저녁으로 삼겹살을 구워먹고 후식으로 차가운 밀크티를 먹었다.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속도 더부룩하고 열도 난다. 결국 밀크티는 다 먹지도 못하고 냉장고행. 잠도 오지 않는데 더 이상 깨있을 수가 없어서 침대에 누웠다. 카페인 덕분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몸이 주는 괴로운 느낌이 결국 괴로운 기억을 끄집어냈다.


밤중에 거실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삼촌의 목소리였다. 잔뜩 술에 취한 삼촌은 아빠를 만나야 하니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엄마는 그런 삼촌에게 거듭 돌아가라고 얘기하는 중이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애처로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아빠는 숨어있었다.


결국 삼촌이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고, 숨어있던 아빠도 거실로 나왔다. 큰소리가 오가고 약간의 몸싸움도 벌어진 것 같았다. 다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동생도 깨어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지만 어떤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처음 벌어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두렵고 무섭다. 동생을 다독이기엔 나 역시 어렸다.


잠시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마당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삼촌이 아빠 차의 유리를 하나, 둘 깨고 있는 모습. 아빠, 엄마의 안전보다 이웃집에 사는 친구가 아무 소리도 듣지 않게 되길 간절히 바랐다.


다음 날, 거실 벽에 희미한 핏자국이 보였다. 할머니방 옆에 걸려있던 십자가상으로 누군가가 누군가를 때린 모양이었다. 아빠가 나와 동생을 따로 불렀다. 아빠는 삼촌이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얘기해주는 대신, 삼촌은 아주 나쁜 사람이니 앞으로 봐도 인사도 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나는 처음으로 아빠가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삼촌이 그런 식으로 찾아온 건 그날이 처음이었지만, 그와 비슷한 밤은 여러 번 있었다. 아빠는 화를 잘 주체하지 못했고, 그 대상은 대부분 엄마였다. 그때마다 모든 소리가 멈추기를. 이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리고 20살이 되자마자 도망치듯 집을 나온 뒤에도 가끔씩 동생에게 그와 비슷한 밤에 있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런 날은 그 집에 있지 않아도 하루 종일 그날 밤 속에 빠져 있곤 했다.


빨리 아침이 왔으면 했다. 아침이 되면 모든 게 해결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그 밤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내 맘속에 차곡차곡 쌓여가고만 있었다. 시간이 늦었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위(胃)가 계속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밀크티를 끊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겨우 잠에 든 나는 밤새 잠을 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