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작 과정 이해하기 #1
1n년 전 책을 만들 때 디자인 및 조판 작업까지 마무리한 후 첫 작업은 '터잡기(하리꼬미: 페이지 별로 앉히기)'해서 출력된 필름지를 확인하는 거였다. 지금이야 PDF 파일 보내면 리핑 후 바로 인쇄 판을 만드니 필름 출력 단계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리핑 후 필름에 우선 출력해 그걸 이용해 인쇄 판을 만들었다.
당시 나는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출력소를 가자고 했을 때 필름 출력을 보러 가는 건 줄 몰랐다. 대학 다닐 때 학교 앞에서 1장, 2장 과제 출력하던 그런 개념으로 알았었다. 그런데 가보니 투명 필름지에 작업한 페이지 모습대로 먹으로 출력된 뭉텅이가 보이는 게 아닌가. 터잡기 한 국전지 크기의 필름지 1장이 1대(책의 16페이지)였고 색 1도 당 1장(4도 작업하면 1대 당 4장인 거다)이 나오니 100쪽이 넘는 책의 필름지는 엄청 큰 덩어리였다. 지금은 리핑된 PDF 파일로 책상에 앉아 확인하고 수정하는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그 필름지들을 엄청 큰 책상 위에 펼쳐놓고 전체를 확인했다. (국전지 크기의 라이트 박스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바쁠 때면 허공에 들어서 보며 확인하기도 했지만 라이트 박스 위에 두고 보는 게 확실하긴 하다.)
책을 만들 때 신기한 건 아무리 여러 명이 여러 번 교정을 봐도 마지막 검판 할 때도 꼭 오류가 나오고 심지어 완성된 책을 받아 처음 펼친 페이지에서 오류를 발견한다는 거다. ㅋㅋㅋ 그러니 필름 출력소에서도 꼭 오류를 찾게 된다. 수정이 번거로우니 웬만하면 수정하지 않고 싶지만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오탈자는 꼭 생긴다. 수정할 부분이 결정되면 사무실에 계시는 디자이너분(비슷한 시기에 여러 권의 책을 제작하게 되면 편집팀, 디자인팀 대부분이 검판을 나간다. 이때 꼭 디자이너 한 명은 사무실에 남아 혹시 있을 수정 작업을 해줘야 한다. 대개 회사와 집이 가까우신 분이 남아계셨던 것 같다.)께 수정할 부분을 알려드리고, 디자이너 분은 수정한 페이지를 출력소에 보내주신다. 그러면 출력소는 수정할 부분만 자투리 필름지에 출력한다. 그리고 오류 부분을 오려내고 거기에 수정한 부분을 붙인다.
글자 하나가 틀린 거면 그 글자 부분만 오려 내고 붙이지만 문단의 길이가 달라져 버리면 그 페이지 자체를 바꾼다. 그걸 쪽갈이라 불렀다. 요즘도 리핑 확인하고 수정할 때 한두 페이지 정도 수정이 필요할 때면 수정할 페이지만 PDF로 만들어 기존 파일에 붙이는 데 이걸 쪽갈이라 부른다. (전체 페이지를 다시 PDF 돌리고 그 파일을 다시 리핑 확인하려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리니 마감이 급할 때면 이렇게 작업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나 더 이상 수정할 게 없다는 확신이 들면 검판한 필름을 모아 박스에 포장해 둔다. 그러면 출력소는 그날 작업한 여러 회사의 필름지들을 모아 용달로 각 회사가 거래하는 인쇄소들로 보낸다. 당시는 파주 출판단지가 만들어지기 전이라 인쇄소들은 충무로와 일산에 분포하고 있었다. 몇 천 부 이상을 인쇄해야 하는 물량은 일산의 인쇄소들이 더 컸기 때문에 다 거기로 보냈었다.
이 과정에 걸리는 시간은 가늠이 불가능했다. 거래하는 출력소가 우리 회사 일만 하는 것도 아니니 다른 회사 작업에 밀려 우리 작업 필름이 나오는 게 늦어져 기다려야 할 수도 있고(이런 부분을 감안해 몇 시까지 오면 된다고 출력소에서 말해 주지만 어디 사람 일이 정한 대로 진행되던가...), 오류가 몇 개나 나올지 모르고, 오류 수정을 위한 파일 수정 작업 및 재출력에 걸리는 시간은 오롯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항상 출력소 가는 날 모두의 바람은 '제발 도착했을 때 필름이 출력되어 있어라, 오류는 없어라'였다. 대개 한나절, 반나절을 통째로 필름 검판하는 시간으로 할애하니 바라는 대로 진행되면 그날은 좀이라도 일찍 퇴근하는 날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재밌는 건 오류가 안 보여서 일찍 퇴근하는 건가 기대하면 반드시 뭔가 일이 터져서 더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거다. 거기다 정말 오류가 안 보여서 일찍 퇴근하면 그다음 공정에서 일이 터지는 경우도 많았다. 결국 과정마다 일찍 끝나는 거 자체가 징크스 ㅋㅋㅋㅋㅋ)
피 터지게 일정 맞춰 마감하고, 하루 이틀 뒤에 충무로로 외근을 가는 건 편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즐거움도 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고 기다리는 시간을 때워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기에 맛집이 많았다. 충무로 좀 다녀보신 분들은 아실 거다. 거기가 얼마나 골목골목 구비구비 많은 업체들이 있는 곳인지. 출력소, 인쇄소, 후가공 업체뿐만 아니라 철물점, 공업사 등도 많았다. 그 업체들에 일 맡겨 놓고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 헤매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기에 식당들은 어느 곳이나 괜찮은 맛을 냈고, 현재도 운영하고 있는 맛집들이 많다(가성비 맛집으로 추천할만한 곳은 을지로 3가역 8번 출구 앞 '동경우동'!). 그 맛집들을 한 군데씩 가보는 건 그날만의 특별한 재미였다. 그리고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집으로 바로 퇴근하는 즐거움도 있었고 말이다. (회사는 방이동, 집은 당산이었다. ㅎㅎㅎ) 거기에다 예상보다 원활하게 작업이 진행되어 오류 수정까지 다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같이 나간 사람끼리 영화 보는 문화의 날이 되었다! 대한극장이 멀티플렉스라서 시간만 잘 맞으면 당시 인기 있는 영화를 보기에도 좋았었다. 상영시간 기다리며 1층에 있는 스벅에서 커피 한 잔 하기도 좋았고 말이다.
이제는 없어져버린 과정이지만 이때 느꼈던 어려움이나 재미는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책을 제작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기도 했고 말이다. 요즘엔 내 자리에 앉아 인쇄용 파일의 최종 확인과 수정이 가능하니 편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무실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들이 적어지기도 해서 아쉬운 것도 있다. 얼마 전처럼 날씨가 지독히 좋은 날은 일하러 가는 거라도 나가는 자체로 즐거운 일이었는데 ㅎㅎㅎ 필름 출력할 일도 없어지고, 인쇄는 파주 쪽으로 보내는 일이 많으니 이제 충무로를 갈 일 자체가 없어졌다. 한때 수없이 들락날락했던 곳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니 문득 요즘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더 더워져서 다니기 힘들어지기 전에 그때 다녔던 맛집으로 밥이나 먹으러 가볼까나~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