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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시인 May 04. 2020

막걸리를 만들면서

숙성 편

 만약 지금보다 삶이 고달파져서 취미 한 두 가지만 가질 수 있게 된다면 당연히 글쓰기와 요리다. 그러다 그 삶에 여유가 조금 더 생긴다면 막걸리를 만들고 싶다. 한 달 동안 막걸리를 만들면서 애착이 많이 생겨났다. 양조 일지에는 9차라고 적혀 있고, 이제 겨우 갖가지 실패를 겪으면서 막걸리스러운 막걸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만드는 과정은 정성을 그대로 녹이는 작업이다. 쌀을 씻고, 불리고, 다시 물기를 빼고, 고두밥을 짓고, 다시 식히고, 누룩물과 함께 섞어 담근 후에도 하루에 두 어번은 져어줘야 한다.

 그럼에도 막걸리를 계속해서 만든 이유는 단순한 노동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제초제가 온갖 잡초처럼 자라는 잡념을 솎아내는데 아주 탁월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수양에만 있지는 않다. 정성을 녹여낸 술덧의 발효가 끝나고 병에 넣어둘 때는 한 해 농사를 마감한 농부처럼 마음이 가지런히 놓이고 은은한 기대마저 든다.

 병에 넣은 그날 막걸리를 바로 마시는 것은 신선한 게 최고라며 생쌀을 씹는 성급한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다 되었을 줄 알았을 때, 조금 더 기다려야 제대로 된 맛이 나온다. 그걸 사람들은 숙성이라고 한다. 숙성은 신기하게도 포토샵 보정처럼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한다. 한 번은 발효에서 온도가 일정치 않아 술덧에서 신맛이 많이 났는데, 냉장고에서 며칠을 묵다오니 신맛은 자기주장을 굽히고, 신맛 때문에 빛을 못 보았던 달짝지근한 맛은 기어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시간을 갖고 기다려보자라는 말은 꼭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를 때만 쓰는 말은 아니다. 5년도 더 전에 만났던 사람이랑은 만나기만 하면 싸우기 바빴다. 주변에서는 그럴 거면 왜 만나느니 했던 거 같은데, 그 사람을 만나면 유쾌했다. 돌이켜보면 싸우면서도  좋았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만났던 거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에는 그 둘의 다름에서 비롯되는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의 환경 즉 같은 또래, 한동네, 결이 비슷한 가치관, 이렇게 희한하게 다 들어맞아도 결국에는


" 비 오는 날에는 역시 막걸리지 했는데, 신념을 굽히지 않는 소주파를 만난다던지.


" 여행 와서는 한 곳에 머물러 그 속에 섞이고 싶어 했는데, 오늘은 이거 먹으러 가야지!라고 하는 아침부터 깨우는 사람을 만난다던지.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다가오지도 않은 갈등의 덫들이 놓인 길을 맨발로 걷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모든 예외로 적용되기 때문에 상관이 없지만,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 어느 순간 잡히게 될 무렵에는 타협이 잘 되지 않는 자신 고유의 것들이 틔어 나오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것은 그 예외 적용이 끝나고서부터이다.

 그 사람과 나는 여권의 색깔부터 달랐다. 서로 말이 통해도 한계가 있었고, 쉽게 얘기해서 문화 차이를 그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 가정은 없지만 지금이라면 더 널은 마음으로 대했을 텐데, 그때는 참 많이도 싸운 거 같다.

 그러다 우리는 그대로 각자 여권에 적힌, 각자 나라로 돌아갔다. 계절이 바뀌어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시간은 숙성의 작용처럼 날카로운 것은 무디게 유쾌한 것은 더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에 한참 시간이 흘러서도 나는 그 사람과 건강한 안부를 물으면서 친구로서 지내고 있다.

 시간이 꼭 모든 것을 숙성시켜주진 못했다. 재작년 여름쯤 서로 지쳐 마음이 다한 사람과 각자의 시간을 가져보자 했는데, 그 후로 아직까지도 기약 없이 각자의 시간을 갖고 있다. 빈병은 어떤 숙성을 거친 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서로의 마음에 최소한 무언가가 담겨있어야 비로소 숙성이 되는 것만 같다.

 막걸리 말고도 사람에게도 숙성이 필요할 때가 있다. 숙성을 거쳐 뒤돌아 보면 성숙이 되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도 향긋하고 달달시큼한 막걸리 한 잔을 마신다. 숙성이 되기까지 참고 기다려준 보상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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