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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시인 Mar 08. 2022

Apocalypsex

  그날의 이곳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그저 새 마스크를 갈아 끼는 것처럼 날짜만 바뀐 지루하고 고단한 반복의 시작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변화는 오고 있었다.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 자신의 무질서한 혼란을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섹스 후의 담배, 그 후의 목까지 차오르는 자기혐오와 저속한 기분, 그리고 이러한 것이 특정한 상태로 노출되었을 때 발현이 되는 것이고, 약으로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약에 종속되기를 바라진 않았다.

 내비게이션도 안되고 가로등도 없는 세기말과 같은 곳에서 그는 홀로 한 걸음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희미한 자국이었지만 나는 달에 남겨진 발자국보다 더 용기 있고 당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와의 대화는 흔한 말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시간은 분명 가는 것인데 움켜쥐고 싶었다. 손에 물을 한가득 담으면 손가락 사이의 물은 겨우 어느 정도 멈춰있지만 이내 별 수 없이 새어나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움켜쥔 시간도 금세 흘러서 가버렸다.

 우리는 서로 아쉬움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심어졌다. 아쉬움이라는 단어는 여러 상황과 여러 관계에서 다양한 의미를 두는데, 우리의 것이 같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나는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구차하게 해부하자면 태어난 연도도 계절도 웃기지만 MBTI도 심지어 서로 활자에 대해 설레고 감동한다는 사실과 같은 신기한 유대감에 더불어 추운 타지에서 온기를 느끼고 싶은 얄팍한 기대감이 교차를 이루었다. 그날 나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수족냉증은 없으신가요?”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남발하며, ‘있으면 어쩔 건데요?’라고 답장이 왔다.

“제가 몸에 열이 좀 많아서요. 온기 좀 무료 나눔 하고 싶은데, 만날래요?”

구닥다리 같은 유쾌함 일지는 모르지만 그는 나와 같았다. 재밌으면 일단 하고 본다. 문제가 생기면 그건 그때 고민하는 걸로.

 술을 마시며 해변을 걸었고, 해변을 걸으며 서로를 보았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 사진과는 다른 얼굴, 생각보다 너무 추운 날씨.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날도 추워지는데 밖에서 그만 서성이고 들어갑시다 이제”

나는 망설임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손목을 잡고 내가 묵는 숙소로 그를 데려왔다. 숙소는 생각보다도 좁아서 몸은 생각보다도 추워서 기어코 한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우리는 서로 한 번씩 좋아하는 노래를 번갈아 틀며, 점점 초기 만남의 목적-'온기 무료 나눔'을 시작했다. 별 거는 아니고 살갗끼리 닿는 정도. 그러다가 그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수족냉증은 진짜 있었네”

“그래서 왔지”

그의 유쾌한 답변에 키득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타지에서 온 사람은 난데, 내가 온기를 주고 있네”

“예측할 수 없지?”

“응 예측할 수 없어. 인생 같아 너”

“꼭 욕같이 들려”

“저속한 표현이지만 흥분된다는 뜻이야?”

“아니 그냥 저속해 너”

 이상한 티키타카 속에서 우리의 몸은 점점 포개져갔고, 동맥 어디 한 군데쯤 그의 심박이 느껴졌다. 우리는 몸뿐 아니라 각자 서로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며, 우리의 ‘언어’도 포개져갔다.


그날 우리는 살갛끼리의 접촉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오르가즘을 느꼈다.


그날은 밤에 반이 가려진 날이었음에도, 넘쳐흐른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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