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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화를 받으러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가방만 남긴 채.
그의 가방을 돌려줘야겠다 생각해서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이상하게 몇 시간 전까지 통화를 했던 그의 번호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기계음이 대신 답을 해주었다.
‘없는 번호입니다.’
나는 그의 단서를 더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가방 속에서는 투박한 수첩이 들어있었다. 훔쳐본다는 마음이 들어 쉽게 펼칠 수 없었지만 혹시라도 애타게 찾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명분으로 두어 조심스럽게 수첩을 펼쳐보았다.
수첩의 첫 장에는 우리가 알게 된 첫날부터 적혀있었다. 어른 같은 그의 글씨체가 칸을 빼곡히 채워 우리와 그의 감정을 묘사해나갔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는 신기하게도 오늘날짜가 적혀있었고 우리가 걸었던 길과 나누었던 말들 그리고 먹고 마셨던 음식까지 다 묘사돼있었다. 내가 혼자 남겨졌다는 것까지 표현되고 나서야 문장이 끝이 났다. 의아한 마음에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역시나 그는 없었다. 헛헛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수첩을 보았다. 페이지를 무심코 넘겼는데, 다음 페이지는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다가오지도 않은 날짜가 적혀있었다.
“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에게 연락이 왔고, 그는 가방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 몇 번이고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간만에 찾아오는 애타는 마음 때문인지 일상과 먼 관계 때문인지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외롭지 않을 때도 종종 그가 생각났다. 그와 겪은 하루는 어렸을 때 분명 겪었던 장면과 순간들이었지만 방학 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어른이 돼서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소슬히 한 철 지난 나무가 되어 이제는 피지 않을 꽃을 뒤로하고
분주하게 세월을 맞는다. 가만히 흔적을 바라본다.
연연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밤중에 어쩌다 핀 달맞이꽃 같던
그날의 그가 더 생각이 난다.
처음 핀 꽃도 아닌데 유달리 더 생각이 나는 것은
세월로 꽁꽁 싸매 왔던 마음이 유유히 풀어지고 있는 광경 때문이 아닐까.
“
그는 앞을 내다보기라도 하듯이 다가오지도 않은 날의 일기를 적었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그를 만나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지만 여전히 그가 놓고 간 가방과 수첩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