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밀도가 기울어질 때, 관계는 이미 불균형하다
요즘의 관계는 빠르다.
온라인은 나이와 배경을 지우고,
직업과 타이틀은 신뢰의 장치처럼 먼저 제시된다.
얼굴을 보기 전부터 우리는 서로의 문장을 읽고,
톤을 해석하며, 마음을 짐작한다.
특히 감정의 결을 빠르게 읽는 사람들,
공감이 빠르고 정서적 반응성이 높은 사람들은
관계의 초입에서 '편안한 사람'으로 분류되기 쉽다.
문제는 그 편안함이
어느 순간부터 쓰임으로 전환된다는 데 있다.
자기표현의 시대인 온라인에서는 특히 그렇다.
악의가 있든 없든, 이런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은밀하고도 전략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그 결과, EQ가 높은 사람들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소모된다.
H양은 사람의 말을 오래 들어주는 편이었다.
상대의 말속에서 감정의 맥락을 읽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구조로 정리하는 데 익숙했다.
기자, 강사, 교육과 서비스 현장을 거치며
사람의 얼굴과 태도를 수없이 마주해 왔기 때문이다.
SNS를 하며 스스로를 브랜딩 하고 마케팅하는 시간들을 취미로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G 씨가 다가왔다.
온라인에 드러난 그의 이력은 공무원으로 안정적이었고,
출간 경험 역시 자연스럽게 언급되어 있었다.
그는 H양의 글 하나하나에 정교한 공감과 해석을 덧붙였다.
"당신 글은 특별해요."
"나는 베스트셀러도 못 믿는 사람인데,
이건 진짜 통찰이에요."
처음엔 공개된 공간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DM으로 감탄을 보내왔다.
그러다 점점, 빈도가 많아지며
메일과 DM 같은 조용한 통로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자세한 이력, 직업, 개인사, 사진까지 보내오며
H양의 경계를 덜게 했다.
그렇게 불쑥 다가와 깊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글쟁이'라는 단어로 '우리'라는 결속을 제시하며
깊은 응원, 이해, 신뢰를 적극적으로 요구했다.
‘글쓰기'와 '책'을 좋아했던 두 사람,
공감대가 있던 만큼 관계는 빠르게 친밀해졌다.
시간이 흐르자 G 씨의 메시지는 길어졌다.
사람과 사회가 무섭다는 이야기,
자신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는 고백,
직업에서 오는 회의와 관계에 대한 피로감.
H양은 시간을 내어 경청했다.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공감하며
자신도 실수, 해프닝, 약점을 오픈해 보였다.
그는 감동하는 듯했다. 누구보다 깊이 공감한다며 둘 사이의 연결성에 특별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둘의 이야기는 대부분 그의 힘든 이야기로 고정되어
갔고, 그녀는 그런 그를 그때마다 위로하며 희망과 에너지를 주려 애쓰는 마음과 시간을 더 쓰게 되었다. 그럴수록 그녀도 조금 가라앉았다.
반면,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친밀해질수록 H양의 꿈과 고민, 상황과 건강에 대한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처음 다가올 때 보여주던 호기심 어린 공감과
"세상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다"는 온도는 사라지고,
반사적인 반응만 남았다.
그가 힘들다고 말할 때 H양은 마음과 시간을 썼다.
그녀의 수면시간, 자기 계발시간을 쪼개어 소통해 왔다.
그러나 H양이 지치고 가라앉을 때 돌아오는 말은 늘 같았다.
“힘내. 몸부터 챙겨.”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위로받길 바라고 토로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할 때 쏟아내던 말의 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그녀가 힘들어하는 순간이 되면 언제나 그는 일이 생기거나 바빴다. 그때 처음으로 그녀가 느끼는 이 관계의 애매한 성격이 어렴풋해졌다.
놀라운 것은, 그들은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어느 순간 G 씨는 H양에게 언젠가 꼭 얼굴을 보자고 했다.
출간을 도와주겠다고 했고, 기획서는 만나야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말했다. 관계가 한 단계 깊어지는 듯한
뉘앙스였다. 기회가 되면 술도 한 잔 하자고 웃으며 슬며시 덧붙였다.
H양은 긴 소통의 기간, 서로 깊이 소통하며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하다며 그것도 꽤 괜찮겠다 싶었다.
하지만 수일이 지나도 그저 비슷한 패턴의 관계가 반복되자
오히려 먼저 구체적인 만남의 날짜를 잡으려 했다.
그때부터 그는 조금 애매한 스탠스를 유지하며,
일정을 계속 미뤘다. 연락도 점점 뜸해졌다.
가벼운 질문을 던져도, 배려나 설명 없이 답이 늦어졌다.
처음 그녀에게 다가올 때 적극적이던 태도와 소통이 편해지기까지는 5분 대기조 같던 답장 텀, 일하던 중에도 나와서 답을 한다던 따뜻한 답메시지는 몇 시간 혹은 다음날이 되어서야 무미건조하게 돌아왔다.
건강, 상황, 컨디션. 그는 점점 드라마 주인공 같았다.
안정된 직장에서는 매일같이 놀라운 사건이 급하게 터지고
그의 설명은 점점 길어졌다.
사람이 싫다, 동료가 싫다며 매 주말이면 집돌이에
극단적인 개인주의자를 스스로 외치던 그가
그 시점부터는 다른 사람이었다.
개인문제로 파면된 동료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연락할 틈이 없다고 했다. 동료를 돕기 위해 주말 늦은 밤에도 집 밖으로
나서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했다.
두문불출, 변화된 태도, 그리고 이어지는 장문의 메시지들.
"일이 너무 바쁘다."
"하루하루가 사건이 터지고 지옥 같다."
핑계는 언제나 충분했고,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설명은 점점 더 정교해졌다.
다만, 그 이야기들은 서로를 논리적으로 전혀 지탱하지
못했다. 그가 먼저 제안했던 만남과 희미하게 언급되던
출간 도움도 끝내 구체화되지 않았다.
수개월간 말은 늘 달콤하고 장황했지만 현실 앞에서,
행동은 전혀 없었다.
그 무렵 H양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최소한의 안부와 공감을 기대했다.
G 씨의 반응은 짧았다.
"갑작스럽네.. 힘내. 무엇보다 몸 잘 챙겨."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 자신의 걱정과 일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날, 그녀는 그에 대한 온갖 정이 뚝 떨어졌다.
최소한의 '도울 일은 없는지'.'상심이 얼마나 큰지'
한 마디도 없었다. 다만, 그간 이어온 관계의 무게와
정체가 그녀의 가장 어려운 순간에
그의 태도를 통해 분명해졌을 뿐이었다.
아, 나는 이 사람에게
사람이 아니라 그저 감정에너지를 공급하는,
쓰기 편한 기능이었구나.
이전에도 애매한 태도에 H양이 멀어지려 하면,
G 씨는 이미지를 복구하려는 듯
자신의 상황과 어려움을 구구절절 적은,
메일을 몇 차례 보내왔다. 그녀의 답이 없으면,
메일 확인 여부를 추적하는 기능까지 사용하며
자신의 답답함을 해소하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H양은 선명해졌다.
이건 사과가 아니라 자기 해명의 연장이었다.
책임 없이 편함만 얻어가기 위한 관계.
그래서 말했다.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고 이어가고 싶지 않아. 우리 보기로 한 거, 어차피 볼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나도 생각 없어졌어. 더는 답 안 줘도 돼.”
그리고 단 1분 1초의 감정도
그 관계에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모든 연락 경로의 차단은 분노의 표현이 아니었다.
에너지를 회수하는 선택이었다.
놀라운 것은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온라인 경로를 차단하니 그 둘은
단 한번 만난 적도, 평생 볼 일도 없는 사이였다.
공자는 말했다.
군자는 화이부동, 조화를 이루되 자기 기준을 잃지 않는다.
모든 관계를 끝까지 붙들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일 수 있으나,
적어도 나에게 아니라면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특히 온라인 관계에서는 더 조심해야 한다.
얼굴을 가리고, 정보를 선택적으로 공개하며,
관찰은 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쉽게 연결되었기에
쉽게 빠져나갈 수 있다는 감각을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다.
감정의 품격은 누군가를 끝까지 이해해 주는 능력이 아니다.
끝까지 참아주는 미덕도 아니다.
자신이 소모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조용히 물러날 줄 아는 태도, 그것이 품격이다.
H양은 그 관계를 떠나며 비로소 확신했다.
존중받지 못하는 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사랑도, 배려도 아닌 자기 방치라는 것을.
쓰기 편한 사람들은
어리숙하거나 순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감정의 결을 읽을 줄 알고,
관계를 깊이 가져갈 줄 알며,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EQ가 높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인의 감정을 빠르게 파악하고,
관계의 맥락을 구조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그래서 한 번 더 기다리고,
그래서 한 번 더 이해해 보려 한다.
문제는 그 능력 자체가 아니라,
그 능력이 항상 관계의 바깥을 향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EQ가 높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감정을 줄이는 일이 아니다.
감정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공감은
행동이 확인된 뒤에 더해도 늦지 않다.
이해는
존중이 유지되는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기다림은
서로의 시간이 균형을 이룰 때에만
미덕이 된다.
관계는
누가 더 많이 이해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같은 무게로 책임지느냐의 문제다.
감정의 품격은
끝까지 버텨내는 능력이 아니다.
끝까지 이해해 주는 미덕도 아니다.
자신의 감정이
언제부터 ‘관계의 자원’으로만 쓰이기 시작했는지를
알아차리는 감각,
그리고 그 지점에서
조용히 철수할 줄 아는 판단력.
그것이
EQ가 높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나를 조금씩 덜어낸 적이 있으신가요.
변화를 넘어 변신에 가까운 얼굴로
살아본 경험은요.
새로워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살아가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