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금보다 깊은 한숨

도쿄의 세입자, 한국의 임대인

by 희유



오늘 오전 휴대폰이 울렸다. 한국에 있는 세입자의 이름이 떴다.


"지난번 얘기한 대로 11월 10일 자로 계약했습니다.

이사 날짜는 11월 10일입니다."


나는 문장을 몇 번이고 되새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 나가기 어렵다고 버티다가, 1년 계약을 새로 하자더니, 이번에는 계약금을 미리 달라고 계속 전화하며, 통상적으로 주는 거라며 조르던 지난 몇 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짧은 문자 한 줄에도 그 피로가 겹쳐왔다.


그래도 곧바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네, 알겠습니다. 계약 만료일은 10월 16일이라 그 이후 거주하시는 기간은 사용료로 정산하게 됩니다. 퇴거 시 그 기간에 해당하는 금액은 월세의 일할 계산으로 정산 부탁드립니다."


짧은 두 문자가 오간 뒤, 화면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늘 그렇듯 집을 둘러싼 '관계의 기류'가 출렁거렸다. 계약은 종이 위에서 끝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사람 사이에서 시작된다.




나는 현재 도쿄의 중심, 미나토구에서 세입자로 산다. 매달 집세가 빠져나가는 순간, 신칸센이 스쳐 지나가듯 통장이 훅 비워진다. 비싸긴 하지만, 이 도시 한가운데서 누리는 풍경과 이동의 자유가 곧 생활의 퀄리티로 돌아온다.


창밖 47층 창가에 서면 도쿄타워가 한눈에 들어오고, 집 밖을 나서 코너만 돌아도 도쿄타워의 붉은 탑이 불쑥 나타난다. 5분만 걸어가면 주요 전철 노선이 모두 이어져, 시부야·신주쿠·긴자 같은 도시의 핵심에 단숨에 닿는다. 도시 전체가 집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매달의 지출 속에 그 감각이 녹아 있다.


꼭대기층 계단 걷기 완주. 선물로 마주하는 47층 일부 전망. 48층은 헬기정류장. 인생의 경험에 투자하는 삶.
집에서 나오면 늘 마주하는 붉은 탑. 도쿄타워.




그리고 또 하나, 도쿄 생활의 재미라면 주차장이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무료인 집주차가 이곳에선 따로 돈을 내야 한다. 자전거는 1인 1대가 기본처럼 여겨지지만, 자동차는 필수품이 아니다. 전철이 워낙 잘 되어 있고, 비싼 주차비와 톨게이트 비용 탓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차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의 풍경을 마음껏 보고 싶었고, 나의 지출은 경험을 위한 비용이기도 했으니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철문이 닫히고, 마치 놀이공원 기구처럼 차가 위로 쓱 올라간다. 꼭대기에서 빈자리를 찾아 '착' 하고 들어가는 그 순간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덕분에 매달 주차비를 내면서도 "이 정도 볼거리가 있으면 괜찮지" 하며 웃게 된다. 작은 불편함에도 위트를 찾는 게 세입자의 생존법 아닐까 싶다.


도쿄 우리집 주차장. 놀이공원 기구처럼, 웃음을 건져낸다. 아이들은 늘 작은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임대업도 조금 한다.

그러니 나는 임차인이자 동시에 임대인이다. 이 두 얼굴을 오가다 보니 알겠다. 집 한 채를 두고 벌어지는 계약은 단순히 재산 문제가 아니라, 사람 관계의 압축판이라는 걸.


도쿄에서의 임대 문화는 단순하다. 계약할 때만 얼굴을 보고, 그 뒤로는 간섭이 없다. 이사할 때 하자가 있으면 철저히 비용을 받지만, 그 외에는 건드리지 않는다. 받을 것 받고, 줄 것 주면 끝. 관계가 단순할수록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반대로 한국에서 임대인으로 있을 때는 묘한 긴장감이 있었다. 계약서를 사이에 두고 앉으면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큰돈이 오가는 만큼 말투 하나, 표정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선다.


물론 한국에서도 좋은 인연은 많았고, 도쿄에서도 까다로운 경우가 있겠지만, 전체적인 공기의 결은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세입자를 구하면서도 속으로 "이번엔 좋은 분 오시길…" 하고 빌게 된다.




나는 오늘도 도쿄에서 세입자로, 한국에서 임대인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두 자리를 오가며 조금씩 배워간다.


살다 보니 알겠다.

세입자든 임대인이든 결국 중요한 건 태도다.
돈의 액수보다 더 오래 남는 건 마음이다.


1원 한 푼을 주고받더라도 서로에게 정중히 감사할 줄 아는 태도,그 작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계약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나도 계약의 순간마다, 작은 인사와 감사부터 놓치지 않으려 한다.


솔직히 말하면, 계약이 끝난 뒤 남는 건 주름과 한숨일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작은 감사 한마디가 늘 숨 쉴 틈을 내어주었다. 결국 그게 내가 버티는 힘이 되었고, 또 내 마음을 다듬는 도구가 되었다.


도시의 심장은 밤에도 쉼이 없다.
늘 불빛으로 차오르는 풍경이 나를 위로해주듯,
우리 삶도 결국 감사와 위로로 이어져 있음을 배운다.


독자 여러분은 계약이 끝난 뒤, 어떤 마음을 가장 오래 붙들고 계신가요?

도시의 심장은 밤에도 쉬지 않는다.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 그 또한 위로와 감사의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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