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와의 마지막 2주

평범한 날들이 마지막에 빛나는 까닭

by 희유

익숙함 속에 숨어 있던 자유를 떠나보내며


도쿄에서의 마지막 2주를 남겨두고,

나는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던 길목들을 다시 걷고 있다.


그동안 수없이 지나쳤던 골목,

익숙해서 더는 맛을 평가하지 않던 음식점,

창밖으로 늘 보이던 풍경,

혼자 걸으며 여러 번 부딪혔던 계단 난간 같은 것들.


평소라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모든 것들에

이제야 다시 시선이 닿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별이 가까워지면,

사람은 새로운 곳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가장 오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지나온 날들 가운데
내가 진짜 행복했던 순간들은
뜻밖에도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아무 일 없던 날들이 내게 불어넣어준 것이

내게는 매일의 숨결과 같았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다.




익숙함은 무감각이 아니라, 축적된 사랑이었다


나는 늘 이곳에서의 일상이

너무 평범해서, 너무 익숙해서

무심하게 지나쳤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완전히 다른 자유의 삶이었다.


일본어와 영어만으로 하루를 살아내야 했던 처음의 불안,

작은 것도 두렵고 낯설었던 나날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무엇이든 혼자 해낼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진 마음이 생겨 있었다.


마치 무인도에 떨어져

스스로 적응하며 생존을 넘어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낸 사람처럼,

나는 이곳에서 오롯한 나로 살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익숙해져 버린 동네의 풍경은

때때로 '평범함'이라는 이유로

그 고마움과 의미를 잊고 지나쳤던 것 같다.


마지막을 앞두고 바라보니,

익숙함이라는 건

사랑이 아주 천천히 축적되었기 때문에 생긴 감각이었다.


익숙함 속에 눌러앉은 작은 기쁨들.

지나온 일상들이

슬픔보다 감사에 더 가까워지는 순간을

나는 지금 겪고 있다.


이별이 가까워졌을 때

마음이 슬픔에서 감사로 건너오는 데에는

분명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선명해지는 메시지.

고마움이 자리 잡았을 때,

비로소 그 이별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이별을 앞두면,

사람은 오히려 '처음'이 아닌 '일상'으로 돌아간다


처음엔 마지막이니까 특별한 곳을 가보고 싶었다.

여기 아니면 못 가볼 장소들을 찾아둘까 싶기도 했다.


사실, 도쿄 여행 책자 안의 장소는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가장 힐링이자, 인상 깊었던

고급스러운 온천여행지도

도쿄를 벗어나 자유롭게 여행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을 앞두니

나는 늘 가던, 가장 익숙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항상 앉던 자리,

늘 먹던 커피,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던 동네의 풍경.


사람은 이별을 앞두고

화려한 특별함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가장 나다웠던 자리에 돌아가

그곳과 조용히 작별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잘 살았습니다.


마음 안쪽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게 되는 요즘이다.




이별의 진짜 속도는

슬픔 → 두려움 → 감사 → 설렘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엔 너무 낯설고 두려웠다.


도쿄가 너무 익숙해져서

한국의 일상조차 낯설게 느껴졌고,

새로운 환경에 뛰어들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을 실감하는 지금,

신기하게도 마음이 달라졌다.


나는 지금 거의 처음으로

돌아감에 몹시 설레고 있다.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오르고,

내가 쓸 수 있는 글이 더 많아질 것 같고,

일과 사람과 감정들이

다시 움직일 것 같은 작은 진동들이

마음을 두드린다.

나의 설렘에 기꺼이 나의 시간을 내리라.


마음이라는 건 참 묘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놓고,

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걸어간다.


지금 나는 도쿄를 떠날 준비가 아니라,

한국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과의 이별도 결국 똑같다


도쿄를 떠나는 감정이

사람과의 관계에도 닮아 있는 걸 느꼈다.


오래 보았지만 익숙함에 무뎌졌던 사람,

많이 스쳐갔지만 깊게 감사하지 못했던 순간들.


우리는 관계에서도

마지막이 다가와야

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슬픔으로 시작되는 이별이

마지막에 감사함으로 채워진다면

그건 좋은 관계였던 사람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미련이 아니라

"그래도 잘 지내라."

라는 마음이 든다면


그 관계는 이미

가장 아름다운 결말에 도착한 것이다.


도시는 사람 같고,

사람은 도시 같아서

헤어 지는 방식이

서로를 비춘다.




나라와 나 사이의 이별도

결국 한 인간의 마음에서 시작된다


나를 대하는 상대를 보면
나도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보이듯,
이 나라가 나를 맞아준 품격을 보니
나도 이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며 대해야 할지
그 방향이 선명해졌다.


나는 이 나라를
조용히,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역사가 남긴 상처와
내가 이곳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온기는
서로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둘이 내 마음 안에서 오래 천천히 섞이며
새로운 이해를 만들었다.


역사를 잊지 않되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
그 사이에서 나만의 애국이 시작되었다.


목소리를 높여 다투기보다는
조용히, 그러나 곧게 서서
두 나라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다.


우리의 것을 지키고,
아이들에게는 연결의 마음을 가르치는 일.


이곳에서 배운 품격을
내 삶의 방식으로 이어가는 일.


그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다.



이별의 철학,

손자와 삼국지가 알려주는 마음의 이치


이별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전략이라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손자병법에서는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非其道不履)"라고 했다.


떠나야 할 때는 떠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무는 것.

마음이 가리키는 바를

억지로 거스르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말했다.

"정치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이별도 같다.

도시를 떠나는 일,

사람과 헤어지는 일,

새로운 땅으로 발을 내딛는 일은

모두 마음의 정치를 필요로 한다.


마음이 정리되면

몸도 자연스럽게 걸어가고,

감정이 정리되면

새로운 길은 저절로 열린다.


내 마음이 도쿄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지금,

한국으로 향하는 길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전장을 바라보는 장수처럼

가볍고도 설렌다.




이제, 이별은 끝이 아니라 나를 데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이별은

무언가를 잃는 순간이 아니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한 숨 고르기다.


도쿄를 떠나며 배운 건

아쉬움이 아니라

감사와 설렘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사람도, 도시도, 순간들도

이별을 통해 더 선명해진다.


이제 정말 이별하려나 보다.

그래서 더 고요하고,

더 따뜻하고,

더 단단하다.


이별 앞에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

어떤 이별에는 새로운 시작이 함께 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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