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아만 주세요, 저는 심한 겁보입니다
아침 출근길에 본다. 언뜻 보기엔 잣 한 방울 같았는데 여름 길목에 잣일 리 만무. 그 정도의 크기와 무게를 가진 무언가를 끌고 가는 개미가 보도블록의 홈에서 낑낑대었다. 돕고 싶었지만 놀랄까 봐 그냥 일어서서 왔다. 땅에 붙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길의 높고 낮음, 수평과 수직 사이에서 수도 없이 그와 같은 날을 보내기 평생.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보인다. 나도 그와 같이 높은 곳에서 날 보는 누군가, 아마 내가 가는 길을 훤히 다 보고 있을 누군가, 가는 길이 힘들어 보여 돕겠다고 내 뒤통수를 쓱 들어 올린다면 아마 나는 무서워서 정신을 놓고 말 거다. 내 세계의 예상치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므로. 두서없이 줄행랑이거나,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릴지도 모르지. 그러니 스스로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섣불리 참견 말자. 혹시 위에서 날 보고 있는 누구님이 계시다면 그냥 보아만 주세요. 저는 심한 겁보입니다. ( 22.6.5 날적이 )
이렇게 생각했었다. 오늘 책을 읽다 보니 이런 말이 있다. “개미는 시계가 없다. … 시간이 무언지 모르는 개미가 여럿 모이면 시간이 덜 걸리는 효율적인 경로를 찾아낸다. … 효율적인 경로를 찾아내는 비밀은 바로, 개미가 남긴 화학물질인 페로몬에 있다. 자신보다 앞서 지나간 동료 개미가 남긴 페로몬을 따라 이동하면서 자신도 페로몬을 바닥에 남긴다. 페로몬은 휘발성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로와 시간이 짧게 걸리는 경로를 비교해 보자. 시간이 짧게 걸리는 경로를 개미들이 왔다 갔다 하며 남긴 페로몬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로에 남긴 페로몬보다 더 많게 된다. 즉, 시간이 지나면 개미들은 시간이 짧게 걸리는 경로를 통해 주로 이동하게 된다.” 『관계의 과학』 김범준
아뿔싸. 개미는 함께 나누고 쌓은 유전적 능력으로 제 길을 가고 있었던 거다. 땅에 붙은 눈은 멀고 높은 곳을 보지 못해 안 된 것이 아니라, 동료가 남긴 흔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지도를 그리느라 낑낑대었던 거다. 무거운 짐을 물고 좁고 높은 곳을 오르려고 용쓰는 그의 평생은 아마 나보다 힘들 거라고, 나는 그에 비하면 높고 먼 곳을 떠다니는 힘센 능력자.라는 무언의 거만을 떨었던 순간에 고개 숙인다. 게다가 개미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 진(眞) 사회성을 보이는 대표적인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니 그만 무안해 뒷머리를 긁는다. 같은 사회적 동물의 종으로서 내 이익이 우선인 삶을 살고 있는 내가 그의 사회적 행보에 대해 내 잣대를 들이민 건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점심을 먹고 천변을 걸으면서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가족을 본다. 비가 내리지 않은 천변은 물도 얕고, 쓸려온 모래로 군데군데 얕은 둔덕을 이룬다. 멀리에서는 떠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가까이 가서 보면 물 위를 흐르듯 걷고 있다. 가끔씩 물에 머리를 박으며 발과 엉덩이를 쳐드는데 그들의 사냥법이 요란하면서도 기특하다. 깊은 물이 아니라도 누가 발이라도 담그라면 양말이거나 장화 거나 무장할 게 많은 사람에 비하면 맨발, 맨몸으로 거뜬히 겨울을 나는 그들이 안돼 보일 이유는 없다. 하거니와 그들의 곁엔 늘 방관자 같은 모습의 노랑부리백로 한 마리가 고고하게 서서 망을 보듯 한 눈을 파는 걸 보면 내가 모르는 세상이 분명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