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게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말
아침에 이부자리를 정리하다 문득 든 생각이, '잃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여러 뜻으로 쓰이지만, 공통은 상실에 닿은 말이다. 다시 찾아지더라도 예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영영 이별의 느낌. 가지고 있던, 알고 있던 소중한 것이 나를 떠났다는 느낌. 비슷한 것일 수는 있어도 같은 것은 없을 거라는 느낌. 비어서 허전하고, 다른 것으로는 온당히 채울 수 없을 거라는 느낌. 그런 느낌으로 온다. 사람을 잃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고, 다음으로 힘든 일은 '믿음'을 잃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은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축)
글을 읽다 보니 사람이나 믿음을 떠나 혹시 날 잃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예전 모습만 온전히 나였다 말할 수 없지만, 지난 일들 중 생각할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일이 있다. 물론 그 모습이 지금의 나에겐 없다.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좀 더 세상에 가까워졌을 거라서. 세상으로 걸어가느라 하루를 무언가로 채우고서도 하루가 지났을 땐 어떤 일이 지나갔는지 되새길 여유가 없다. 시간의 정지를 느낄, 마음의 빈틈을 느낄 겨를이 없다.
웃기는 얘기지만 수박씨를 마당에 퉤- 하고 마구 뱉고 거기서 싹이 나오는 걸 코 박고 보던 여름날의 일상이, 과자부스러기를 일부러 흘려놓고 개미들이 입을 맞추며 오가는 일상을 보는 것이 하루 전부였던 적이 있다. 지루하지 않았다. 물론 어렸을 때 얘기다. 어른이 되어 내 몫의 일이 많아져서 그런 일상으로 하루를 채우는 날들은 멀어졌다.
하루의 알맹이를 채운다고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정보물과 말들의 파편이 쌓이고 쌓이다 나중엔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시간이 흐른다. 더 끼워놓을 곳 없이 쌓인 후에는 일단 꺼내어 지난 일들을 들추어가며 지금과 멀어진 순으로 버리기 시작한다. 버려지는 그 안에도 지난 나는 있고, 버려지는 중에도 여전히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빈틈을 바라고 정지의 진공을 원하면서도 계속 버리고 채워가는 것으로 하루를 채운다. 하긴 버려야 채운다. 새로운 질문, 변해가는 세상, 맺어지고 단절되는 관계 속 방향에 따라 이럭저럭 흔들리며 왔다. 복잡한 여러 개의 세상에 발을 담그며 살아도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떤 게 나인지. 어디까지가 나이고, 얼마만큼의 질량으로, 나에 가까운 삶을, 얼마나 정직하게 살아왔는지, 살아가려는지.
말이 사실이나 진실과 다르다는 것은 숱하게 봐왔고, 사람들의 모습만 봐서는 그의 일부도 보지 못한 것이며,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말과 행동을 두고 왜 그래야 하는지 따지다간 세상을 알려면 아직 한참 먼 거라고 타박 듣기 일쑤. 내가 나를 사는 것처럼 사람들도 그들을 살고 있는 것이고, 어떤 경우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다. 세상일엔 정답이 없다.
수박씨에서 수박이 자라고, 개미가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순진한 세상 앞에서 눈을 끔벅이며 하루를 살고 싶은 나도, 여러 개의 세상에 발을 담그고도 잘 살아지는 나도 다 내 모습이다. 잃었다고 하지 말고, 잃지 않도록 지금을 살며, 잃었다는 생각에 빠지는 날엔 된통 진한 표식 남기며 살고 싶은 의지가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자. 뭔가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잃는다. 가진 게 있는 사람만 쓸 수 있는 말이 ‘잃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