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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랑무 Feb 10. 2023

아홉 살 내 인생

빨간 벽돌집 연탄값


계단을 두어 개 올라선다. ‘문을 열까? 문 앞엔 자기 집도 끌고 다니는 커다란 개가 너 누구냐는 듯 있는 힘을 다해 짖어댈 텐데…’ 손을 대려고 가까이 갔을 뿐인데 사자 입 벌린 묵직한 대문 손잡이 벌써 차다. 그르렁 소리 담 넘는다. 망설인다. ‘뭘 더 생각해? 얼른 들어가. 어두워지잖아’ 손잡이 앞에서 주춤거리다 계단 옆 작은 턱에 엉덩이 걸치고 앉는다. 골목 끝을 기울여 눈을 준다. 서녘집 대문 앞 노란 불빛 환하다. 배고파. 찬 기운이 올라와 퍼들, 그만 몸서리를 친다. 춥다. 엄만 아직인데.


“이이모오! 이모오-”

소리를 높여 부르며 대문을 민다. 아, 기를 쓰고 짖어대는 사냥개 포인터. 찌그러진 양은밥그릇이 사명감으로 주억거리는 발길질에 동댕이쳐지며 빈 소리 요란하다. “야, 캐리! 그만!! 야” 밥을 먹다 나온 듯 우물거리는 입은 아직 나를 보지 못했다. 슬리퍼를 끌고 나온 사촌오빠가 개를 막아선다. 훅- 개비린내. 종일 끓였는지 공기 중에 떠도는 명태대가리, 내장 발림에 좁쌀 이긴 개밥 냄새 섞여 더 비리다. 코 싸 쥘 틈 없이 후다닥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을 향해 뛰어간다.


누구를 소리 높여 부르는 건 낯설다.

날 기다리지 않는 사람을 소리 내 부르기는 망설여지는 일이다. 잠을 자는 중이면 깨야 할 테고, 밥을 먹고 있다면 숟가락 놓고 일어서야 할 테다, 더구나 한참 재밌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면 참 미안할 노릇이기에. 빨간 벽돌 이모 집에서는 흠뻑 넘치는 많은 것들이 내겐 없었으므로 모든 걸 가진 이모를 소리 높여 부르는 건 미안하고도 낯설었다. 오빠가 셋, 언니 하나인 이모집에서 이모가 나오는 날은 드물었지만, 어린 내가 그중 누구라도 부르는 건 침 몇 번 삼키고도 쉽지 않은 일. 다섯 식구 사는 방 한 칸 셋방이 뭔지 잘 몰랐지만, 문이 잠겨있을 땐 대문을 흔들어 누굴 부르긴 망설여졌다. 초인종은 말할 것도 없다.


큰 마루로 통하는 작은 문을 열면 한 줄 좁은 쪽마루로 이어지는 곳이 ‘우리집’이다.

이모집에 딸린 셋집. 작은 문은 불문율, 잠겨있다. 작은 문이 열릴 때 간혹 있었다. 명절이 다가오거나, 집에 큰 손님 치를 일이 있을 때. 그러면 나는 틈을 타 작정한 듯 넓고 어두운 마루를 사뿐히 밟고, 이층으로 이어지는 밝고 윤이 나는 계단을 경이롭게 올려봤다. 빙 돌아 올라가 보는 그림도 그린다. 좁고 낮은 동네, 이층 마당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낯선 풍경은 내 어린 날 세상 둘도 없는 멋진 신세계였다. 깨금발로 네 발가락만 얹어 없는 듯이 살금 거리는 불편함도 그 풍경을 매일 볼 수만 있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하지, 생각했다. 소리 안 나게, 그림자처럼, 온몸과 두 손까지 공중에 띄운 듯 가비얍게 들고서.


연탄으로 보일러를 돌리는 시절에 이모집 연탄창고는 비는 일없이 그득했다. 연탄보일러로 물을 데우고 욕실의 욕조를 빌려 목욕을 할 수 있던 날이 있었으니 명절 전야. 뜨거운 물에선 부연 김이 오르고, 물 가득한 욕조에 서둘러 몸을 데웠다. 사방이 타일, 차디찬 공기에 물만 뜨겁게 잠깐 데운 거라 물 밖으로 나오면 얼마나 추웠는지 바들바들 떨었다. 시간을 들여 공기를 덥힐 정도의 에너지를 누리기에 가정집에선 꿈꾸기 힘들던 시절이었다. 부옇게 찬 공간에서 엄마는 열심히 우리들 때를 밀었다. 그러자면 엄마는 마음이 무척 바빴겠지. 먼저 씻겨 나를 내보내야 동생들 나오면 얼른 준비하고 있다가 옷을 입혔다. 엄마가 동생들의 때를 열렬히 미는 사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나오다 이모를 마주쳤다.

“연탄 값 내!”

“?!”

“돈 안 내고 목욕했으니까 연탄값 내야지-”

“……”


그날 저녁, 연탄값이 얼마냐고 엄마한테 물었다. 난데없는 바람이 마음에 순서 없이 불었다. 잡동사니 같은 사연들을 모조리 끌고 가난인 줄 모르던 날들이 우르릉 쾅쾅 왔다. ‘곤로’나 ‘연탄’으로 물을 데워 찬물을 섞어 씻던 시절에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철철 나오는 걸 보는 것도 신기할 일인데 물 온도의 변신이 놀랍기도 잠시 씻은 값을 저울질했다. 하고많은 좋은 기억 다 놔두고 왜 하필 ‘연탄값’일까. 틈에 박힌 먼지처럼 잘 닦이지도 않고, 서랍에 차곡차곡 넣어 봉인할 수도, 분리해서 버릴 수도 없는 기억. ‘뽀빠이’가 십 원, 돈 있으면 이십 원짜리 ‘자야’를 사 먹던 시절에 내 깜냥으로 연탄값은 추운 날씨만큼이나 계산되지 않았다.


연탄값이 얼마냐고 물어나 볼 걸 했다. 돈 없다고 큰소리 칠 걸, 다시는 여기서 안 씻는다 못을 박을 걸 그랬다. 다행히도 그로부터 이 년 후 우린 이모의 셋방을 나왔다. 어찌어찌 어렵게 집을 마련했다. 대문은 가벼운 알루미늄 자동문, 사자모양 손잡이는 없다. 호기롭게 문을 열고 큰 소리로 “엄마!”를 외쳤다. 우리에겐 작은 욕실도 생겼다. 더 아껴 온수를 썼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엄마는 이층 올린 우리집을 꼭 장만하리란 결심을 오래 했다는 거다. 도시락을 열면 납작납작 누워있는 납작보리쌀이 부끄러웠다던 내 말에, 어쩌다 별미로 좁쌀 넣어 밥을 한 날 대뜸 “개밥!”이라며 안 먹었다던 어린 동생의 말이 속상했다, 섞어가며. 아이 셋 데리고 언니네 셋방을 사는 동안 알게도, 모르게도 섭섭한 날 있었겠지. 늦게까지 일을 하고 돌아와 뜨거운 물을 데워야 씻을 수 있는 작고 어두운 부엌이 많이 추웠겠지.


아홉 살 내 인생에게 어른의 셈법을 미리 알려주신 이모!

가끔 빨간 벽돌집 꿈을 꿉니다. 동네의 낮은 담 이어진 골목을 따라 뛰다가 집 앞 계단 앞에 멈춘 어린 나를 봐요. 엄마 오시는 길로 고개를 돌립니다. 엄마를 기다리느라 아직 문 앞입니다. 어두워지는 어느 날 한 번쯤은 날 향한 따뜻한 손짓 있었겠지요. 이제 엄마가 된 나는 삶에 무뎌지는 마음으로나마 아이를 마중하기 위해 문을 엽니다. 어린 날의 허기를 온기로 채워주신 마음 헤아려 보면서요. 그러게요, 이모. 살다 보니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더라고요. 계신 곳은 편안하신지요, 늦은 인사드려요





 


같이 보면 좋은 책 : 

『아홉 살 인생』/ 위기철 /  청년사 / 2001

같이 읽으면 좋은 시 : 

연탄 한 장 /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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