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같은 이불로 찾아오시는 엄마
친구야 놀자, 문밖에서 친구도 부르지 않아 무료했던 날, 아랫목에 발을 넣고 엎드려 포갠 두 손 위로 얼굴을 묻고 있다. 바닥에 닿은 숨기운으로 얼굴을 녹이며 고개를 돌린다. 검은색 자개 문갑과 경대 아래로 동굴 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다. 저 안에 뭔가 있는 거 같아 고개를 바로 하고 눈을 크게 뜬다. 고개를 기울이면 반짝 뭔가 빛이 나는 것도 같았는데.. 엎드린 채 기어가 코를 박는다. 손이 닿을까? 손을 대신할 젓가락이라도 있어야 저 반짝이는 걸 끌어낼 텐데 굳이 그럴 뜻은 없다. 일어서면 추운 공기로 겨우 데운 몸이 식을 테니 그냥 이대로 잠이 들어도 좋다 싶은 온기 탓에. 가물가물 졸음에 눈이 무겁다. 경대 서랍을 열고 예쁘게 입술을 바르는 엄마가 흐릿 보인다. 바스락거리는 치맛자락을 끌며 내 앞을 지나간다. 한복 입은 엄마는 예쁘다. 한쪽으로 빼어들며 겨드랑이 사이로 치마를 감추고 걷는 엄마는 누구의 혼례를 도우려는 걸까, 잔치가 벌어질 때마다 불려 다니던 엄마는 음식을 차려내는 눈썰미가 좋았다. 오늘도 누군가의 잔치에 화답하느라 종종걸음을 재촉하는 길이다.
엄마가 서걱거린 자리엔 서늘한 바람이 지난다. 잠이 깬 나는 방금 나간 엄마 경대서랍을 열어 훑는다. 바늘, 옷핀 쌈지에 5원짜리 동전도 있다. 다 닳은 립스틱과 분, 입술과 눈썹을 닦는 가제손수건, 손거울, 한복 고름을 고정시키는 브로치, 안으로 손을 더 넣어본다. 언제 찍었는지 모르는 바랜 사진도 몇 장 있다. 하나씩 꺼내 엄마처럼 흉내를 낸다. 칠해보고 달아본다. 빙글 돌아도 본다. 앉은 참에 경대 면면에 박힌 미로 같은 길을 손으로 따라간다. 폭포 같은 물을 거슬러 구름에 닿았다가 산을 따라 내려온다. 공작의 깃을 타고 한바탕 놀라 치면 사슴의 꽃잔등에 손이 닿는다. 산, 구름, 바위, 물을 벗 삼은 것들이 날거나 뒤를 보며 걷는다. 그들에게 내민 손이 시작한 자리로 돌아올 때쯤 손을 놓았다. 나른한 오후였다. 시간이 멈춘 자리는 영원히 늙지 않을 거 같은.
마루 한가득 펼친 이불을 보고 있다. 며칠 후면 나는 시집을 간다. 작은 꽃자수가 점점이 박힌 풀 먹인 옥양목 위에 솜을 놓고 그 위엔 노란 비단꽃밭, 나비를 얹었다. 옥양목 곱게 접어 올리며 날더러는 저쪽을 좀 더 당겨라 손을 구한다. 가로와 세로 아귀를 맞춰 바느질을 한다. 구김 없어라, 가고 오는 세월 엉키지 말고 잘 풀려라, 꽃처럼 나비처럼 사이좋게 살아라, 뇌며 땀을 이었을 엄마 마음은 나는 몰랐다. 속 몰랐던 딸은 그저 이불장을 정리할 때마다 점점 무겁고 오래된 이불이 되어가는 비단금침을 두고 망설였다. 새털같이 가볍고 따습고 환한 이불이 좀 많아, 이제 그만 정리할까 봐, 이사로 정리되는 물건들 틈에 이름이 올랐다 내려가기 수차례. 두꺼워 쓰지 않은 신혼이불 한 채는 그래도 이사 때마다 골동품처럼 다른 세간을 앞장섰다. 침대를 썼던 적도 있지만, 바닥 생활을 해야 몸이 편하다는 남편 덕에 매일 이불을 펴고 갠다. 침대를 쓰면 편할 텐데 일어나면 이불을 개는 ‘의식’을 여태껏 하며 산다. 이불장 아래 묵힌 이불을 꺼내려고 보니 엄마 해주신 이불이다. 어제오늘 춥다고 해 오랜만에 꺼내 펼친다. 참 곱기도 했다. 이불홑청을 빨아 바느질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 대신 침구사에서 덧씌우는 것으로 새로 박아왔지만 여전하네, 울 엄마. 이 고운 게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건 나이를 먹어서일까... 빨강에, 노랑에 분홍이 고와 보이는 나이가 되고서야 늙은 엄마를 한참 쓰다듬는다.
경대 앞에서 하루를 밝히고 나섰던 엄마여, 서걱거리는 푸른 기운 품고 집을 나섰을 엄마! 언젠가 소파에서 잠든 나를 보고 ‘들어가서 이불 펴고 편히 자, 종일 밖에 있다 들어오면 엄마는 다른 건 몰라도 꼭 따뜻한 이불을 덮었어. 그러니 너도 다른 건 몰라도 이불이라도 뜨시게 덮으라’ 셨지. 손수 이불홑청 바느질하며 무탈을 기도했을 엄마 마음을 늦어서야 헤아린다. 스스로에게 온정을 베풀라는 말씀이었지. 해마다 추운 날이면 봄날 같은 이불로 찾아오시는 엄마. 좋은 날 다 놔두고 춥고 지친 날 어찌 알고 찾아와 꽃나비 환한 그림을 그리시는지. 지나간 시간은 늙지도 않고 떠올릴 때마다 새로운 길, 자주 오세요 엄마. 처음인 듯 맞을게요.
같이 보면 좋은 그림책 :
『만희네 집』/ 권윤덕/길벗어린이/2016
같이 들으면 좋은 노래 :
드라마 '눈이 부시게' 봄날은 간다 / 송상은 노래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