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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랑무 Feb 21. 2023

부엌, 문에 대한 기억

옆구리마다 틈을 남긴 늙은 문 앞 서성이는

문은 칸을 가르고 용도를 나누는 역할을 한다.  현관문, 방문, 부엌문, 거기 복닦이며 사는 사람들 마음에 닿는 문까지. 마음의 문은 누구나  있지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밀한 공간의 출입구니 이 문은 빼자. 현관문은 집의 시작이고, 남의 집과의 구별이다. 방문은 부모의 공간과 자녀의 공간을 가름이다. 어쩌면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일지도. 좀 다른 것은 부엌인데 부엌은 음식을 하고 함께 나누는 공간이자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다. 설명절 즈음해 갑자기 추워지니 잊고 있던 기억이 불현듯 끌려 나온다. 부엌과 문에 대한 기억이 바로 그것.


시댁에서 보내는 명절은 조용히 분주했다. 시어머니와 내가 하는 준비였던지라 우리 애들 둘 빼면 명절치고 시끌벅적한 풍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집안 문중에서 마지막으로 들르는 종손 아닌 종손역할을 했던 집이니 준비하는 음식이 많았다. 집안 어른들부터 자손들이 한 번에 몰아닥치면 앉을 곳도 마땅찮아 젊은이들은 밖에서 서성였다. 비라도,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처마에 듣는 물을 그대로 맞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기 민망했다. 명절 끝 문중회의로 시끌하던 시간이 지나면 다음 차례는 내 몫의 뒷정리와 설거지였다. 집이 새로 지어지기 전, 자식들이 태어났던 그대로의 집 부엌엔 수도가 없었다.


궂은날의 명절은 대략 난감이다. 비가 와도 피할 구석 없는 수돗가로 그릇을 나르고 설거지를 한다. 물 한 양동이를 데워 찬물과 섞어가며 기름기를 씻어내고 찬물에 댕강댕강 던져 담가 헹군다. 차곡차곡 엎어 그릇들을 정렬한다. 날이 더 궂어지기 전에 얼른 설거지를 끝내야지, 마음에 손이 바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부엌엔  문이라기보다 바람막이 같은 존재가 있다. 네 귀퉁이 아귀가 딱 맞는 샷시문이라면 들고 간 무거운 스테인리스 그릇들을  내려놓고 문을 여는 수고를 했어야겠지만, 문은 열린 채다. 나무로 틀을 만들고 철판 같은 재질을 둘러 못을 박은 문은 한쪽에 무겁게 서 있다. 그는 때가 왔을 때 역할을 다하기 위해 조용히 기다린다. 


일이  늦은 밤, 바깥에서 서둘러 씻다 부엌을 바라보면 어두운  등 하나 빛난다. 검은 외줄 끝에 달린 백열등이 '춥다, 어서 들어오라' 흔드는 걸 보고 있으면 급한 마음에도 내 갈 길이 그곳이라 일러주는 걸 보는 것만 같아 따뜻했다. 부엌에 가까워지면 나보다 먼저 들어선 내 큰 그림자가 흙벽을 올랐고, 물항아리 언저리를 일렁였다. 그는 내가 가리키는 너머의 높은 곳에 손이 닿았다가 항아리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종일 바빴던 내게 이제 그만 쉬어, 나머지는 내가 할게. 어두운 고요가 말하는 듯했다. 그제야 하루를 끝낸 안도감으로 문을 당겨 닫았다. 


뜨겁고 찬 기운이 섞이는 곳, 뜨거운 김이 빠져나가고, 찬 것을 알맞게 데우는 데는 몸의 온도가 필요했다. 손등으로 한 방울 시간의 뜸을 재던 부엌. 식구들과 손님의 음식을 만들어 내갈 때 몸의 온기를 쓰는 것은 음식의 마무리이기도 했고, 마음의 온도이기도 했다. 정성을 들이는 만큼 삿된 기운을 물릴 수 있다 믿었다. 하루의 일들을 끝내고, 나를 거쳐간 바람도 거두어 잠재우고 하루를 닫아준 곳 부엌과 그를 지킨 문의 기억은 유독 궂은날 떠오른다. 


요즘처럼 들고나기 편한 문이야 여닫기 쉽다. 바퀴도 없이 무거운 부엌문은 아침에 열면 잘 때가 되어서야 닫았다. 동네 웬만한 소문쯤 머무를 구석 없으니 금세 흩어지라고, 쥐라도 있으면 맘껏 드나들어 쉴 때가 되어서나 닫았다면 맞을까. 부산한 하루가 문 하나로 정리되었다. 나이를 먹은 집의 기둥과 문틀은 맘씨도 좋아 문이란 문의 옆구리마다 틈을 남겼다. 문틈으로 온기를 나누느라 추운 몸을 데우기까지 더딘 시간을 보냈다. 부엌 아궁이와 이어진 온돌방은 하나, 명절 시댁에선 시어머니와 애들 데리고 함께 한 방을 쓰고 한 이불을 덮었다. 집이 남긴 틈과 온기를 새삼 기억한다. 틈이 있는 채로도 온기 나눌 수 있었던, 틈은 시간을 더디 데우지만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데우기도 했던, 순純 온전하지 못했던 문들의 노고. 


칸을 내고 용도를 내는 문은 이제 오차 없이 정밀해서 문을 닫는 순간 정말 혼자가 된다. 딸깍, 단절음을 내야 안심이 되는 문을 오늘도 닫는다. 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기 위해 문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헤아릴 수 없는 어둔 밤을 건널 때  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체온을 나눠 시간이 더디 흘러도 좋으니. 체온을 나누어도 손해인 줄 몰랐던 시절엔 이런 문의 세상이 올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때 비하면 단단히 혼자가 되는 세상은 세련이기도 하지. 정돈되지 않은 세계에서 진심이 무언가 배운 나는 영 조야粗野한 탓인가, 다 늙은 문들 앞을 서성인다. 내 온기로 마음을 나누던 부엌과 무거운 입처럼 하루의 밤을 닫던 문을 떠올리면서. 얼마나 남았을까, 이런 나의 기억은. 






같이 읽으면 좋은 그림책 : 

『깊은밤 부엌에서』 / 모리스 샌닥 / 시공주니어 / 2017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키친』 / 요시모토 바나나 /  민음사 / 1999

같이 읽으면 좋은 시 :

『부엌의 불빛』 / 이준관 / 시학 /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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