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내려도 될까
“엄마 내 방 절대절대 치우면 안 돼 알겠지?” 아이가 학교 가며 말했다. 아이가 가고 난 후 방문을 열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모르는 새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여름바다를 만나지 못하고 다용도실에 구겨져있던 물놀이 튜브가 통통하게 살이 올라 드디어 제 몸을 드러냈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부실한 공기주입기로 저걸 밤새? 하는 생각도 잠시다. 알록달록한 우산 하나가 파라솔처럼 튜브를 에스코트하고 있다. 가까이 가 천천히 빙 둘러본다.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책 한 다발이 곱게 층을 높였다. 웃음도 나고 미안하기도 했다. 내가 해도 한참이었을 저 주입기로 야곰야곰 배를 채워가며 만지작거렸을 밤. 그걸 하기까지 굴렸을 작은 머리. 또 그걸 하기까지 바다를 달려 둥실 띄웠을 마음... 치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보는 거 같아 마음 한구석 짠했다. 아이가 원했던 방 속의 방이 아이의 낮과 밤을 어루만지며 아이가 가고 싶은 곳이 되어주고 있었다.
내게도 저런 밤 있었지. 꼭 저만 했을 때.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입구를 빛도 못 들어오게 단단히 막고 불을 밝히던 밤. 음극과 양극을 이으면 꼬마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이치를 배우던 ‘국민학교’ 4학년 때쯤이지 싶다. 극의 이치는 모르겠고 불이 들어오는 것만 신기해서 책상 밑에 내 방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싸다고 엄마는 사주지 않았던 마론인형을 총각이던 막내외삼촌이 사줬지. 뭐 이런 걸 사 오냐고 엄마는 동생에게 눈을 흘겼을 테지만. 피부색이 어떻고, 눈이 얼마나 크며 외국의 인형이 우리 아이들에게 끼칠 영향이 어쩌니 하는 말은 지금의 어른들 말이다. 어린 내 마음에 그걸 선망한 적은 없다. 그저 내가 보살필 무언가 생겨 부지런히 서툰 바느질로 옷을 해 입혔다. 왼쪽과 오른쪽이 짝짝이어도 좋았다. 뒤집어야 할걸 생각 못해 어깨에서 팔로 넘어가는 데가 좁아 징징 울어도 좋았다. 뜯고 또 뜯어 너덜거려도 그런 맛으로. 그에게 침대를 만들어 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밤낮으로 전구를 밝혔다.
결혼하고 이사를 자주 다녔다. 익숙해질 만하면 다니다 보니 어떨 땐 뿌리 없는 나무 같다고 생각한 적 있다. 좋은 카페, 도서관, 책방이 넘치는데 어른이 된 내 마음은 허공을 떠다닌다. 1층은 처음 살아본다. 1층은 베란다 앞 화단도 가꿀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온전히 집 안에서 본다. 가까이서 나무를 보고 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사하고 일 년이 지나 베란다에 캠핑의자를 펼쳐 앉아 밖을 내다봤다. 달 밝은 밤 뜨거운 물 한 잔 그와 권커니 자커니 해도 내 맘이다. 잎 다 떨궈 앙상한 가지, 지는 해에 베란다까지 드리운 날엔 그림자에 손을 포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내 방’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면 더욱 딱이다. 이제 그만 뿌리를 내려도 될까?
딸은 어느새 캠핑의자를 자기 방 베란다에 두고 잎 다 진 모과나무를 보며 남친과 통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