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평화
밤이 긴 겨울의 일은 되도록 미루고 보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다. 느려진 일들은 이제 그러려니 한다. 어차피 낮이 짧으니 핑계도 된다. 해가 지기 전에 어서 해치우면 늘어진 시간을 당길 수 있는데도 그런다. 추워진다고 베란다로 들였던 화초들은 물을 흠뻑 주지 않아선지 생기가 없다. 어디 물 탓이랴. 춥다고 내 한 몸 뭉그적거리느라 다른 몸 아랑곳없었겠지. 그래봐야 봄은 온다. 봄은 대세다.
포슬포슬 흙을 일으킨다. 겨우내 잠든 땅을 깨운다. 화단을 정리하는 참이다. 몇 해 전에 심어둔 튤립이며 참나리가 벌써 싹을 올리고 있다. 사이사이를 비껴가며 호미를 댄다. 흙냄새가 난다. 1층 화단을 만났을 때 이제 비로소 땅에 꽃을 심을 수 있겠구나, 그거 하나 좋았다. 뭘 좀 심으려고 땅을 파다 보니 깨진 타일, 벽돌 같은 사금파리들이 많았다. 돌도 많고, 나무뿌리 얽힌 건 말도 못 한다.
땅 파다 나온 돌을 둘러 가며 화단 경계를 만들었던 걸 치운다. 보기 좋게 정리하려고 ‘잔디분리대’라는 걸 사둔 참이다. 경계를 따라 호미로 흙을 긁어낸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운 땅속은 다사다난하다. 사금파리는 끝도 없이 나오지만, 이 봄, 어느 나무에서 나온 뿌리인지 가늠할 수 없는 생명의 줄기가 놀랍다. 내 길 닦자고 잔뿌리를 잡아 뽑는다. 내 힘으로 이길 거 같으니까 묻지도 않고 한다. 딱 거기까지다.
쇠 호미로 턱턱 걸리는 게 깊이 박힌 돌이라면 주변을 살살 파내어 이를 뽑듯 하면 된다. 엄지 손가락만 한 힘센 뿌리가 허연 몸을 늘어뜨리고 흙을 움켜잡고 있는 걸 보면 파낼 방법도 없거니와. 아직은 마른 등걸 같은 나무가 땅 밑에서 부지런히 물을 올리고 있는 숨통을 끊는 일은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친다. 내 경계 하나 짓겠다고 섣부른 쇳조각 하나로 힘을 휘두르자니 호미를 쥔 손에 그만 힘이 빠진다.
뿌리 하나를 만날 때마다 흙을 도로 덮는다. 분리대의 중간중간 흠을 내어 건넌다. 그렇게 경계를 지었다. 눈앞 경계 하나 짓는다고 속속들이 내 것이 되는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역류의 힘으로 꽃을 피우는 나무가 평화로워 보인다고 자연의 순리 운운하는 나의 마음이 무엇을 바라기에. 내 손에 쥔 쇠 하나가 무기가 되어 돌을 이기고, 개미굴을 어지럽힌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질서를 범하려 한다. 세상의 모든 평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투한 결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