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고 작고 야무진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
대천 가는 버스 안, 고속도로가 만원이다.
누군가 : 기사님, 차 안에 히터 좀 꺼주시면 안 될까요?
기사님 : 히터 안 켰어요!
누군가 : 근데 왜 이렇게 덥지?
다른분 : 차가 가다 서다 하니까 멀쩡한 사람도 멀미나요.
기사님 : 그럼 어떡해요? 차가 밀리는데.
그 분 : 좀 쉬었다가 한 번에 주욱 가주시면 안 될까요?
기사님 : …….
3월 1일 연휴 첫날,
막히는 도로 위 만원 버스는 결국 에어컨을 틀고 가다 서다 반복하며 대천을 향해갔다. 네 시간 반을 도로에서 가다 서다 했다. 시누네 집에 한 시간 앉았다가 세시 반 차를 타고 집에 오니 저녁 일곱 시다. 조카 결혼식 날 일터를 비울 수 없어서 연휴에 혼자 미리 다녀오는 길이다. 집에 오니 저녁밥 기다리는 눈친 듯 앉아있는 남편을 보니 말하기가 영 싫다.
남편 : 누나네 집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 : 아니
남편 : 근데 왜 텔레비전도 안 보고 밥도 안 먹냐
나 : (말없이 쳐다보며) 그걸 몰라 물어, 종일 멀미나 그런다. 한 시간 얼굴 보려고 예닐곱 시간 버스 안에서 흔들렸는데 눈치가 그리 없어서 엇다 쓰니. 말이라도 한마디 해주면 좀 좋아? 수고했다고.
모르지 않았는지 “그거 일도 아니다, 나 저번에 중국 갔을 때 있지? 그날 업체 담당자 삼십 분 만나려고 열나게 뛴 거 모르지? 늬 남편은 허구헌 날 그리 살어” 집에 와 눈도 안 마주치고 씻고 방에 들앉아 핸드폰에 코 박고 있으니 답답했는지 하는 소리다. 딱히 뭐라 말하기 그래 돌려 던져보는 어깃장소리겠지, 하다가 심사가 꼬여 "하고 싶은 말이 정말 그거야, 이 시점에?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자기 하는 일은 맨날 무겁고, 내가 어쩌다 하는 일은 가벼운데 별거 아닌 일로 심술부려 불편하게 한단 그 얘긴 거지...?" 하려다 말았다.
시누네 집 앞 화단에 올망졸망한 꽃이 피었길래 쪼그려 앉았다. 오랜만에 혼자 가는 시누네 집에 막 달려온 거처럼 선뜻 발 들이기 쉽지 않아서 잠시 숨 돌릴 겸 앉은 참이기도 했다. 요샌 시절이 좋아 꽃 이름 알기 앱이 다 있다. 꽃을 찍으면 꽃 위로 점, 선들이 마구 그려지면서 꽃 이름을 알려준다. ‘개불알풀’이라고 뜬다. 이름이 뭐 이래. 꽃은 이렇게 쪼고맣고 예쁜데… 파라파라 흔들리는 봄꽃이 이름에 영 맞지 않는 옷 같다.
결혼 생각이 없다던 시누 큰딸은 고맙게도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다. 몇 해 전 세상을 뜬 아주버님이 그 모습을 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야무지고, 손맛 좋고, 알뜰하기로 치면 둘째라기 섭섭한 시누가 사별한 지 몇 해. 아직도 시누는 돌아가신 아주버님 얘기를 곁에 있는 이 말하듯 한다. 마치 어제 함께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생생하게, 잊지도 않고, 언제 지난 장면과 나눴던 말들까지 두루두루 섞어가며 큰 소리로. 이런저런 얘기 두런거리면서 손맛 좋은 시누님이 차려주는 따뜻한 밥 한 끼 맛있게 먹고, 활새우 사줘서 감사히 들고 올라왔다. 남편에게 설마 막된 마음이 들었을 리 있나, 그냥 말로는 못하는 이유 있는 날,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필 내가 가는 길이 신호등도 건널목도 없는 고속도로, 게다가 연휴였다. 차가 막히지만 않았으면 뻥뻥 뚫려 시원하게 달렸을 도로 위 버스 안에선 뛸 수도 없다. 그럴 땐 도로 사정에 따라야지 별 수 있나. 좀 쉬었다가 한 번에 주욱 가면 좋겠다 싶은 마음은 있지만, 뒤에서 줄줄이 따라오는 차들은 어쩌고. 빨리 가자고 뚫어놓은 게 고속도로 약속인데 내 맘대로 하는 건 또 아니지. 뒤차들 아우성 거뜬히 감당할 만큼 통 큰 배포면 또 모를까. 답답해도 신호등 건널목 만난 셈 치고 고속도로 정체가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건 당연지사.
「모모」의 도로청소부 베포가 말했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서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선 안돼.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달릴 땐 곁눈질할 겨를이 없다. 차가 가다 서다 하니 찬찬히 보게 된다. 가야 할 곳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남은 거리, 도로 이름, 저기 먼 데서 일하는 사람들, 계절에 흔들리는 온갖 풀꽃이며 순이 오르는 나무들을. 마음이 바쁠수록 멈춰있기 어려운 일상 속에서 의도하지 않은 정체를 만나 심심한 위로를 얻었다. 저들도 수십수만의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겠지. 멀리 볼 것 없이 요즘 같은 시절엔 더욱.
숨소리도 없어서 풀에게, 그가 쥐고 있는 땅에게도 아무 일 없는 줄 알았다. 너무 낮아서 피는 줄도 몰랐다. 어떤 이는 잡초는 경계도 없이 막 자라 순식간에 어디로 뻗어갈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라. 뭘 조심하라는 거지? 닥치고 생명력? 겨울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던 애들이 먼저 피어 계절을 알리니 제법 반갑기만 한데. 뿌리 깊어 논밭 작물에 해가 되지 않는 모퉁이 낮은 풀꽃은 괜찮지 않은가. 뿐더러 돌보지 않아도 제 할 일 하는 풀꽃 만한 사람 찾기도 쉽잖은 요즘 부는 바람 앞에 당당한 이 당찬, 낮은 꽃이 고맙게 눈물겹다. 어른들이 “작은 꽃이 예쁜 법”이라고 하는 말뜻을 이제 좀 알겠다.
시절 따라 피고 지는 이들에게 안부를 건넨다. 개불알풀에게 네가 온 우주고 생명이구나, 하는 사이 시누가 왔다. “뭐 해, 안 들어가고” 막상 시누는 집에 없었는데 봄풀 보며 괜한 뜸 들였네. 털고 일어서는데 그러고 보니 시누님 닮으셨네, 작고 야무지고 건강한 이 풀꽃. 생명의 봄을 반갑게 알리는 이름이 시누님에게 딱이다!
개불알풀의 다른 이름은 봄까치꽃이다. 봄이 온다고 버선발 마중하는 이름이 멋지다. 모진 겨울 이겨낸 낮고 작고 야무진 이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모모』/ 미하일 엔데 / 비룡소 / 1999
같이 보면 좋은 세밀화 그림책 :
『봄여름가을겨울 풀꽃과 놀아요』/ 박신영 / 사계절 / 2016
같이 읽으면 좋은 시 :
『풀꽃』/ 나태주 / 지혜 / 2021
같이 들으면 좋은 노래 :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 김창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