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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 and R Jul 07. 2017

14. 『숨결이 바람 될 때』-폴 칼라니티-흐름출판

★★★★★

기간: 2017.6.27

한 줄 댓글: 진정한 욜로 폴 칼라니티.


  정신과 의사이자 이 책의 작가인 폴 칼라니티. 이 책을 끝으로 서른여섯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기 전 폴의 마지막 기록. 책은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어린 시절부터 폐암을 선고받기 전까지 삶의 기록이고, 2부는 폐암 말기로 죽음을 선고받고 나서의 삶의 기록이다. 하지만 이 책을 완성하기 전에 폴은 죽음을 맞이한다. 책이 미완으로 남게 됐다고 그의 아내가 에필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폴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는 바람에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미완성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251p) 삶이란 언제까지 살아야 완성일까? 평균 연령이 80이니 80까지는 살아야 완성일까? 그전에 죽는 사람들의 삶은 모두 미완성인가? 삶에 있어서 완성과 미완성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사실 우리의 삶은 모두 미완성인 채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폴의 아내인 루시는 폴의 죽음을 보며 삶의 특성 중 한 가지를 깨달았다. 삶에서 완성이란 없다. 그러니 이 책이 미완성으로 남은 것도 결국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폴의 책이 미완성으로 남은 것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 책은 오히려 어떤 완성된 책 보다도 더 완성된 책이다.


  폴은 프롤로그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다. 그러고 나서 1부로 들어간다. 1부에서 자신의 삶을 너무나도 담담하게 기록해놔서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하게 된다. 문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책을 쓰고 싶다는 자신의 꿈, 어떤 계기와 철학을 가지고 의사가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도덕적인 명상은 도덕적인 행동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나는 영국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예일 의과 대학원에 입학했다.(66p)

  1부에서의 그의 삶은 행복해 보인다. 전문의가 되기 전이지만 이미 주변 의사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교수 자리를 제안받는다. 직업에서의 만족감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열정과 꿈, 사랑하는 사람과의 좋은 관계까지 폴의 삶은 그 누구의 삶보다 풍요롭고 생기가 넘쳐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2부에서 죽음을 선고받고 나서 그의 삶은 너무 슬프다. 그렇다고 그가 죽음을 부정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물론 살고 싶다고 말한다. 솔직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있지 않는다. 남은 삶에 최선을 다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다. 그는 죽음을 이해하기 다시 문학을 읽었다. '솔제니친의 ≪암 병동≫, B. S. 존슨의≪운 없는 사람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네이글의 ≪정신과 우주≫, 울프, 카프카, 몽테뉴, 프로스트, 그레빌, 암환자들의 회고록 등 죽음에 관한 글이라면 뭐든 읽었다.'(179p) 그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폴은 의사들이 환자들의 생존기간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에 분노했던 사람이다. '6개월 남았습니다' 같은 구체적 수치는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자신도 의사지만 이런 수치는 누가 가르쳐 주는 건지 의아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죽음을 앞두게 되자 자신의 담당의사인 에마에게 남은 시간을 알려달라는 식의 말을 한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면 쉬울 텐데요. 2년이 남았다면 글을 쓸 겁니다. 10년이 남았다면 수술을 하고 과학을 탐구하겠어요."' (166p) 하지만 그는 의사들이 확실하게 그 수치를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폴은 이 부분 뒤에서 남은 기간이 얼마인지에 따라 자신이 무엇을 할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3개월이 남으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1년이면 책을 쓰고, 10년이면 지금처럼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남은 삶의 기간을 알지 못하는 폴은 과연 이 중에서 어떤 삶을 선택했을까?


  우리는 요즘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같은 라틴어 문장에 관심을 갖는다.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이다. 끝판왕으로 'YOLO(욜로)'가 등장했다. You Only Live Once. 인생은 한 번뿐이다라는 뜻이다. 이런 식의 문장이 왜 유행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런 문장이 20, 30대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예측해볼 수 있다. 많은 20, 30대 청년들이 이 사회에 희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회에서 청년들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결혼, 출산, 연애, 주택, 인간관계, 꿈, 희망까지 포기했다. 더 이상 포기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도피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를 즐기고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말은 철학적인 말이다. 깊이 사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유행시키고 있는 청년들은 이 말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인다. 욜로를 찬양하는 청년들의 결론은 쾌락주의다. 내일 당장 죽을 건데 지금 하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인생은 한 번뿐인데 이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욜로족 덕분에 내수시장이 활성화되고 있다고 한다. 한 번뿐인 인생, 갖고 싶은 거 갖고 먹고 싶은 거 먹으면서 살겠다는 거다. 하지만 욜로로 인해서 하필 소비가 증가한다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한 번뿐인 인생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왜 하필 욜로라는 유행이 소비의 증가로만 나타나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건강하던 사람도 오늘 당장 신호등을 건너다가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가? 집 밖으로 나가는 우리 모두는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돌아다니는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것과 50년을 살 것처럼 사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일까? 사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살았는데 안 죽는다면? 50년을 살 것처럼 살았는데 50년을 못 채우고 죽는다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죽음을 기억하고 현재를 즐기고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말은 사실 평생 살 것처럼 사는 사람들한테 필요한 말이다. 인생을 어떤 목표를 성취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목표에 매몰되어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이다. 당장 목표도 보이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는 청년들에게 쾌락을 추구하라는 의미로 쓰인 말들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폴은 이 시대의 진정한 욜로가 아닌가 싶다. 폴도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하지만 폴은 결국 훌륭하게 선택해낸다. 나는 폴이 최고의 삶의 자세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삶이 10년, 1년, 3개월 남았을 때 자신이 할 선택들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다. 의사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 그리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보내는 삶까지 모두 선택한다. 나는 내 삶이 3개월, 1년, 10년이 남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할까? 그걸 생각한다면 폴이 보여준 것처럼 현재를 가장 충실하게 사는 하나의 답이 되지 않을까? 폴의 숨결이 바람이 되었지만, 그 바람이 나에게로 와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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