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을 들킨 남편

by 달하

하루 업무의 첫 시작으로 메일리스트를 점검하다가 익숙한 이의 낯선 메일을 받았다.

"JJ줍줍님이 문서를 공유했습니다"

제목 : JJ줍줍의 와인리스트

클릭과 동시에 놀라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했다.

머릿속에서 웅장한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나무를 벨 시간이 8시간 주어진다면, 6시간은 도끼의 날을 가는 데 쓰겠다.

- 에이브러햄 링컨 (Abragham Lincoln)


링컨을 소환하게 한 남편의 공유리스트에는 여태까지 사 모은 500개의 와인이름들이 적혀있었다.

남편은 아가를 재우고 묵묵히 와인을 마시며 해당 와인들의 이름, 생산국가, 가격, 언제 어디에서 와인을 구매했는지, 향은 어땠는지 등을 와인이름 옆에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었다.

와인이 좋다는 남편의 말이 한 때 좋다 말다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편 숙연해졌다. 그리고 이런 우직함이 우리가 타인에게 열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여주는, 묵직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문과를 다니다 돌연 의사가 되겠다 선언하고 하루 16시간씩 공부하며 시험을 준비하던 딸에게서 부모님은 비슷한 마음을 느끼셨을까. 누군가의 열정이 눈으로 보였을 때, 타인에 대한 의심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그 자리는 응원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다.


일단 그는 아내의 의심 섞인 생각을 베어냈다. 6시간을 도끼의 날을 가는데 썼나 보다.




며칠 후 남편이 말했다.

"자주 이용하는 와인업체 대표님이 독일에서 하는 큰 규모의 와인행사에 나를 초대했어."

"응?"

"며칠 독일에 다녀와도 될까? 방탄이 어린이집 하원은 어머니에게 부탁드려 봤는데 괜찮다고 하셔."

"응 그래, 그럼 다녀와."


남편이 누군가에게 열정을 들켰나 보다.

"와인업체 대표님이 왜 거기서 나와?" 또는 "아 500개의 와인리스트는 독일에 가기 전 놀라지 말라고 보낸 메일이었건가?"라고 묻기보다는 즐겁게 다녀오길 응원하는 마음이 들었다.

첫째를 낳고 보니 둘째가 태어나기 전, 하고 싶은 것과 재미있는 것은 원 없이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곧잘 내가 원하는 것, 재미있어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나와는 달리,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내 질문에 그는 늘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돈 잘 벌고 가족들이랑 잘 사는 거."


그러던 그가, 드디어 본인이 재미있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결혼 6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그의 "선호"가 신선했다.

슬며시 500개의 가격이 얼마일까 계산기를 두드려보려다가 멈췄다.

일단은 지금의 신선함을 즐기자.




자신이 재미있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눈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이야기를 하며 즐거움으로 표정이 풍부해져서 얼굴이 말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새로운 얼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앞으로도 그가 재미있어하는 것들을 많이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의 새로운 얼굴들을 더욱 많이 알아가고 싶다.

내가 재미있어하는 것들에 대해 늘 들어주던 그로부터, 그가 재미있어하는 것들을 듣고 싶다.


결혼 6년 차, 우리는 이제 다시 알아가는 사이인가 보다.

재미있는 것을 공유하는 재미있는 사이가 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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