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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Mar 03. 2024

우리들의 이모님

덕분에 살아가는 나날들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지방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출근을 못 할 것 같아요. 갑자기 죄송합니다."

"네. 이모님. 조심히 다녀오셔요."

  일요일  아침. 낮 시간 동안 둘째를 돌봐주는 선 이모님께 전화가 왔다.

선 이모님은 '아프다면 진짜 아픈 사람'이므로, 나 역시 잘 다녀오시라는 말이 거리낌 없이 나왔다. 그녀가 우리 집으로 토요일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출근한 지도 벌써 4개월 째다. 그간 지각 한 번 없었다. 달력을 보니 지난 수개월동안 그녀가 결근한 날은 그 일요일을 제외하고, 감기가 지독하게 걸렸던 날 하루뿐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건 필시 사명감이라고.

 

 첫째 때는 내 마음이 못나서 이렇게 사명감 있는 이모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의 사명감을 알게 되기 전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맞으려나.

  '우리 아가를 잘 보고 있나' 감시하는 엄마를, 첫째를 돌보던 이모님들도 못 느끼진 않으셨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시선이 '감시'라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관계를 이루는 시선이 너무나 곱지 못했다. 또한 그들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을 땐,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아가를 돌봐주는 여성은 유난히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사실을 말이다. 그들은 아가가 잘 때 화장실 청소를 해달라던가, 반찬을 만들어달라는 것같은, 업무조건에 명시되지 않은 일들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별 것 아닌 일’을 해주지 않으면, 야박한 사람이 되기 일쑤다. 첫째를 돌봐줄 분을 구인하며 나도 그랬다.

‘시간이 나면 이모님이 설겆이도 해주시고 화장실청소도 해주시면 좋겠다.’

 드러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생각이 그랬으니 매한가지다.  이 얼마나 계약조건을 무시하는 아마추어 같은 생각이었는지! 기대하는 업무가 있으면 가능한지 타진해서 그만큼의 임금을 올려서 계약하던지, 아니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상식임에도 말이다.


 둘째를 돌볼 분을 구하면서 나도 좀 달라졌다.

  "아가를 돌보는게 우선이니, 다른 집안일은 신경 쓰지 마셔요."

다른 집안일까지 하다보면 아무래도 아가돌봄에 집중할 수 없기에, 이모님이 아가와 관련된 일만 하는 것이 나도 제일 바라는 것이었다. 감시의 시선을 거두고 부당한 요구는 하지 않으며, 그렇게 선 이모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 시작했다.




   '이모'라는 여성들에 대한 글을 읽다가, ‘다른 여성을 고용하여 아가 돌봄을 맡기는 것'에 대한 댓글을 보았다.

 "그건 또 다른 여성에게 힘든 일을 전가하는 것이에요."

 "전가"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부정적인 이미지와 졸지에 나 역시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넘기는 사람"이 되었기에, 유난히 그 댓글이 기억에 남았다. 아마도 그 댓글을 쓴 사람은 아가돌봄을 일로 선택한 여성들이 하기 싫은 힘든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신에게 다른 재능이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온 이모님들은 작은 존재를 사랑하고 예뻐하는데 큰 능력을 지녔었기에,기꺼이 선호하는 일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그것이 그들의 재능이다.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마음'과 아이들을 돌보며 습득한 지식과 경험이 조화를 이루어, 그들의 전문성이 키워진 것이다. '아이를 키워낸 경험'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경력이다.따라서 자신이 잘하는 일, 전문성을 가진 일로 돈을 버는 그들이 '타인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수 없이 맡게 된 사람들'이라는 문장으로 묘사되지 않길 바란다. 그들은 최소 3kg 이상의 아가를 반나절 이상 안았다 뉘었다 할 수 있는 체력까지 겸비한 사람들이니.

  둘째가 산후조리원에서 퇴소한 생후 14일 차부터 정부지원 산후관리사의 도움을 받은 나는, 더없이 그들의 존재에 고마움을 느낀다. 어느 날 한 산후관리사에게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는 여성 중 일부는 본인이 하는 일을 밝히길 꺼려한다는 말을 들었다 적잖이 놀란 나는, 왜요?라고 물었지만, 당시이 그 분도 글쎄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아이돌보는 일을 하는 것을 숨기는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한 가족을 얼마나 살리는 일인지를. 한 가족에 더해 그 가족과 연결된 이들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일임을 말이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감시의 시선을 거두고 고마움을 담은 눈으로 바라보니, 당신에게 고마운 것들만 보인다고 말이다.




  오늘도 이모님이 이른 아침 아가를 맡아 안아 주셨기에 사라졌던 나를 챙기고, 첫째를 챙겨 어린이집에 보낸다.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집안일을 마치고, 첫째를 돌보느라 무채색이 된 남편이 주섬주섬 본인의 색깔로 돌아오는 모습을 본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우리의 몸이 '시간이 담긴 그릇'이라면, 이모님이란 그릇은 아가모양의 작은 호롱병을 하나씩 더 품어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시간이 아가의 성장으로 이어짐을 몸으로 느끼며 말이다. 그리고 그 옆에, 우리들의 그릇이 서로가 서로에게 맞닿아 기대어있지 않을까. 그녀들을 향해 고맙다 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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