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리운 날에
한 겨울, 돌배기 아가를 안고 진료실 앞을 떠나지 못했던 엄마는 무탈하실까. 그 돌배기 아가가 20년을 살아내어 내 가장 어린 환자가 되었다. 근 20년 동안 병원에 다녔으니 진료기록이 한 사람의 역사였다. 13개월 남아가 걷지 못해 내원했다는 소아과 선생님의 기록에서, 그 아이가 걷게 되었다는 내용을 찾지 못해 슬펐다. 스무살이었지만 소아과병동에 입원해 있던 김 군은 코로나에 다른 호흡기 바이러스가 중복감염 되면서 심한 폐렴으로 중환자실 신세를 졌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올라온 이후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전, 어떻게 하면 환자가 집에서 잘 지내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여 우리 팀으로 협진의뢰를 한, 소아과 전공의의 눈이 고왔다. 병실에서 본 김 군은 영양공급용 뱃줄과 호흡유지를 위한 가정용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 집에서 석션만 잘했어도 아이가 중환자실까지 가진 않았을 텐데......"
아이의 옆에서 엄마가 말했다.
20년 동안 아이를 돌봐왔음에도 엄마가 가진 자식에 대한 부채의식과 미안한 마음이 안타까웠다.
'어머니 20년 동안 아이를 돌본 그 자체만으로도 모두 대단하다고 할 텐대요.'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 건네지 않았다. 조용히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으로 퍼져 그녀의 속이 조금이나마 환기되길 바랐다. 환자의 상태를 살핀 후 가정간호팀과 조율하여 그가 집으로 퇴원시 가정방문 하기로 계획했다. 석션에 두려움이 있는 어머니에게 팀 간호사가 병실로 방문하여 여러 차례 올바른 석션법을 교육하였고, 김 군이 집으로 퇴원할 경우 우리 팀에서 그의 집으로 정기적으로 방문해 살피기로 했다. 그렇게 김 군은 집으로 무사히 퇴원하였다.
그로부터 1주일 후 담당 간호사와 함께 김 군의 집에 방문했을 때, 그는 모로 누워 양손의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카트라이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뱃줄과 가정용 인공호흡기는 그대로였지만 김 군의 모습은 한결 편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나 이렇게 게임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나의 인사에 김 군은 입모양으로 인사를 해주었다. 이런 상태의 환자는 의식도 온전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스스로의 무지가 탄로 날까, 놀란 입을 조용히 가렸다. 그럼에도 김 군은 약간 웃어주었던 것 같다. 집이어서였을까. 병원과 다르게 집은 의사에게는 호들갑을, 환자에게는 웃음을 허용하는 공간이다. 함께 방문한 간호사가 가정용 석션기로 시범을 보이며, 다시 한번 어머니에게 교육을 하였고 위급시 사용할 앰부백을 점검한 후 앰부배깅을 정확히 하는 법을 다시 알려드렸다. 간호사가 위루관이 들어가 있는 배 쪽 피부와 꼬리뼈 쪽 욕창을 차례대로 살피는 동안 나는 김 군의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오가며 각자의 삶으로 나아가는 동안, 김 군과 엄마는 병원을 오가며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김 군이 병원에 발을 들인 한 살 무렵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엄마는 어려웠던 치료에 노심초사를 몸으로 겪었던 날들과 그 사이에 병원학교를 무사히 오간 아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어머니의 기억 속 계절들은 김 군이 첫 진단을 받으며 유난히 혹독했던 겨울이나, 김 군의 상태가 가장 좋았던 어느 봄으로 기억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아들과 함께 십수 년의 계절을 통과하며 병원을 오갔던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어머니의 이야기는 몇 번의 중환자실 이야기를 거쳐 내가 등장하는 현재에 와 닿았다. 현재에 다다른 어머니에게는 또 다른 결정이 쉽지 않은 결정이 남아있었다.
"이번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들이, 지금 인공호흡기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또 안 좋아지면 그때는 답이 없다고 하대요. 이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산소포화도가 떨어지자마자 중환자실로 들어갔는데, 또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래요. 중환자실에서 그렇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까......"
어머니는 중환자실 천정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던 김 군의 얼굴이 떠오른다며 눌렀던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의 자녀라면 어떻게 하실 건지 물었다.
10여 년간 의사로 일해 오며 나는, 정립된 의학적 지식 외에 내 생각이나 의견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이런 질문에는 늘 도망쳐왔으나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았다. 나 역시 아가를 키우면서 스스로도 수없이 가정하여 질문해 보았었기에 나름의 정제된 생각을 말씀드릴 수 있었다.
"중환자실은 우리가 임종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고, 오히려 힘든 장소예요. 아이가 또다시 질병 악화로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음에도 산소포화도가 낮을 경우, 이제 아이를 편안히 보내주시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어머니는 그저 우셨고, 고맙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김 군에게 방문했던 계절'로 기억될 23년 봄이 지나가고 또다시 겨울이 되었다. 나는 그사이 개인적인 사유로 퇴사를 하였고, 김 군을 인계받은 선생님에게 그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어디서 임종하셨나요?"
"집에서 임종하셨대요."
이번에도 김 군의 어머니는 결정을 했고, 그것을 지켜냈다. 김 군을 향한 어머니의 결정은 그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오롯이 그를 위한 것이었음을 안다.
스트레쳐카에 누운 채 인공호흡기를 가지고 진료실을 오가는 이들과 보호자들에게, 겨울은 더 혹독하다. 아들이 누운 스트레쳐카를 묵묵히 밀며 수 많은 겨울을 통과해나갔을 어머니의 손에 입김을 전해본다.
어머니. 어머니의 겨울은 이제 끝이 났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