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맥.
갑작스러운 비 소식에 티브이가 시끄럽다.
희숙은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는 다른 한 손으로 휠체어를 굴려 베란다 가까이에 갔다.
유리에 부딪쳐 흐르는 빗 물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싶었다. 그 소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다.
타닥타닥. 주룩주룩. 어지러우면서도 정갈한 소리.
그녀는 비 오는 날이 좋다.
따뜻한 집에서 정신없이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각양각색의 동그란 우산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남들 일하는 날 쉬는 건 조금 짜릿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부러움만 남았다.
시간은 그 부러움을 조금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익숙함을 주었지만
기어코 가슴이 쓰라려온다.
그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려고도 했다. 저 발걸음들이 얼마나 힘겨울지. 얼마나 무거울지. 아니 그녀의 돌덩이 같았던 발걸음을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차라리 지금이 낫다고 생각해보려 한다.
그날은 분명 그랬다.
그저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날따라 늦어진 퇴근 시간과 왜인지 그날따라 만원인 지하철이 얄궂었다.
처음으로 허리까지 기르리라 했던 머리카락이 앞사람들의 어깨사이에 끼어버렸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빼내어 옆으로 모아 넘겼다. 한 달 뒤에는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부드럽고 일렁이는 예쁜 펌을 할 테다. 머리 잘한다는 미용실도 알아봐 두고, 미용사한테 보여줄 사진도 찾아놨다.
지갑 안에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복권 한 장, 교통카드 한 장, 가벼운 체크카드 한 장. 비상용 신용카드. 비상용 현금 만 원이 전부였다. 그래도 꿈이 있었다. 몇 년 뒤엔 남들처럼 여행도 가고, 차도 사고, 30대가 지나가기 전에 자상한 남편을 만나 오손도손 함께 살겠노라. 하루를 버티는 꿈이 있었다.
철퍽.
낡은 운동화는 빗물을 그대로 머금었다.
질척거리는 양말이 거슬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앤 마리의 2002가 흘러나왔다. 희숙은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만큼은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횡단보도는 운 좋게도 그녀의 걸음에 맞춰 초록불을 켜주었다.
철퍽.
철퍽.
도로 위 페인트 칠은 사정없이 쏟아지는 빗물의 웅덩이에 가려졌다. 원래라면 빗물에도 비칠 수 있게 반짝이는 유리알을 넣었어야 했는데, 아마도 공사비를 아꼈겠지. 아마도 알아서 잘 가리라고 생각했겠지. 아마도 자신들은 혹시나 발생하는 사고와는 관련이 없을 거라 생각했겠지.
택시 기사의 아내는 왜 그날따라 남편을 보챘을 까. 택시 기사는 장대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전화를 왜 받았을 까. 그래서 찻길을 착각한 걸까. 그래서 자신이 가야 할 자리를 벗어난 걸까. 기사는 앞에 있는 차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가는 길에 차가 있어서 피하다가 그랬다고 했다. 횡단보도를 보지 못했다고도 했다. 빨간 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왜...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퍽 -
붕 -
희숙의 몸은 공중으로 내던져졌다. 얼마나 위로 갈 수 있었을까. 얼마나 높이 날았을 까. 세상에 태어나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안타까웠다.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고작 예쁜 머리를 하고 싶었던 게 다였는데. 내년 휴가 때는 반드시 해외여행을 가자고. 그렇게 매년을 버텨왔는데. 언젠가는 자상한 남편과 오손도손 - 따뜻한 집에서 영화 한 편 틀어놓고 치맥도 하고 싶었는데...
퍽.
희숙의 몸은 차갑고 질척이고, 딱딱한 시멘트 위에 떨어졌다.
택시 기사는 지나치지 않고 구급차를 불렀다.
그녀는 그 와중에 그게 고마웠다.
택시 기사가 그대로 뺑소니를 치면 어쩌나 걱정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들 바쁘니까.
희숙은 구급차가 신기했다. 생각보다 좁은 구급차 안에서 그녀가 알아볼 수 있는 건 호흡기뿐이었다. 구급대원이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걸었지만 희숙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만약 불구가 된다면 - 혹시 얼굴 어딘가에 큰 상처가 남는 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부모님은 슬퍼하시겠지. 다음 생에도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희숙의 생각보다 그녀의 몸은 멀쩡했지만 다리는 돌아오지 못했다. 내세울 건 튼튼한 몸뚱이뿐이었던 그녀는 이제 내세울 게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악착같이 간직해 오던 꿈도 먼지처럼 사라졌다.
부모님은 결혼을 권했다.
희숙은 그 자리에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녀와 기꺼이 재혼을 해준 남편은 집 안의 똑같이 생긴 문들 중 하나를 걸어 잠그고는 그곳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죽은 딸의 방이라고 했다.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다.
희숙은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같은 침대에서 밤을 보냈고, 매일 밥을 차리고 집 안 청소를 착실히 해냈다.
남편은 무뚝뚝했지만 가끔 희숙에게 꽃을 사다 주었고, 집에 일찍 들어오는 날에는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녀를 데리고 밖에 나가 외식을 하기도 했다. 주말에는 수족관이나 박물관도 가주었다.
어느 날 희숙이 바다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남편은 조금 놀라는 기색으로 그리고 왜인지 조금은 기뻐하는 듯한 얼굴로 그러자고 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희숙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눈물을 흘렸다. 매일 창문을 보며 기다리는 빗물처럼 눈물을 펑펑 흘러 보냈다.
그녀는 그날 남편과 한참 동안 영화를 골라 틀었고, 배달 어플에서 고르고 고른 치킨을 시켰다.
남편은 맥주를 사오겠다며 우산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